[엔노시타] -14

pinn_pond 2016. 1. 15. 17:27


-14

엔노시타 치카라

 

 

 

 

엔노시타는 지금이 좋았다. 적당한 학교생활과 적당한 부활동. 중학교 때 공부를 그렇게 못하는 것도 아니어서 취업보다는 진학을 권유받았다. 담임선생은 그에게 조금만 더 공부하면 주변에 있는 대학보다 좋은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고 했다. 엔노시타는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여겼고 만족스러웠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그는 조용한 학생이라고 부를 수 있었다. 눈에 띄지 않는 그렇다고 해서 존재감이 아예 없지도 않는 삶을 살았다.

그런 엔노시타에게 고등학교 진학 후 들어온 배구부에서는 약간의 일탈을 부어주었다. 2학년 때 들어온 신입생들의 활약으로 인터하이까지 진출한 경험이 있었다. 물론 레귤러는 아니었으나 그와 포지션이 비슷한 전 주장이 부상으로 경기에 임하지 못했을 때, 잠시나마 코트를 밟을 수 있었다. 전 주장만큼은 하지 못했지만 나름 엔노시타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뛰었다고 여겼다. 분한 마음은 있었다. 그리고 분한 마음은 그때뿐이었다.

자기 자신이 배구에 대해서는 부족하다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인식하고 있었다. 너무 힘든 연습에 도망친 적도 있었다. 같이 하던 친구들의 충동질이라고 애써 변명했다. 나만 고된 게 아니었으니까, 나만 도망친 게 아니었으니깐. 그리고 불현 듯 그리워진 배구부를 다시 찾아가니 전 주장은 아무 말 없이 그들을 받아주었다. 그게 또 좋아서 처음으로 엔노시타는 열심히 배구를 했다.

3학년들이 은퇴를 하고 그는 생각지도 못한 주장 완장을 이어받았다. 매우 부담스러웠다. 엔노시타가 생각하기에 자신은 주장의 재목이 아니라고 여겼다. 그래도 그는 배구부와 전 주장에게 빚진 것이 있기에 토하나 달지 않고 수락했다. 엔노시타는 배구부 주장이 되었다.

이제 강호가 된 그의 배구부는 그에게 십자가였다. 속죄하기 위해 엔노시타는 최선을 다해서 배구부를 이끌려고 노력했다. 그의 배구 부원들은 최선을 다해 따라와 주었다. 낙엽이 떨어지는 계절에 엔노시타는 배구에 대한 긍정적인 마음이 생겼다.

겨울 합숙을 지나 새 학기가 시작되고 정식으로 부원을 받았다. 작년의 명성에 힘입어 꽤 괜찮은 1학년들이 많이 들어왔다. 모두 제각각 연습에 연습을 더하고 4월을 지나 5월에 들어갈 무렵 엔노시타는 1번 유니폼을 받았다. 그리고 그는 주전이 아니었다.

자신보다 한 살 많던 작년의 세터 포지션의 선배처럼 엔노시타도 그렇게 경기에 나갈 수 없었다. 승리를 맛보았고 승리에 대한 쾌감을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기에 코치의 결정은 납득 가능한 수준이었다. 엔노시타는 후배를 독려해줬다. 그는 주장의 역할을 톡톡히 해냈으며 벤치에서 응원했다.

 

이제 슬슬 진학 준비 해야지.”

진로희망조사표를 보면서 의자에 앉아 있는 여자가 입을 열었다. 엔노시타는 땀과 먼지로 범벅된 검은색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아직까지도 흐르는 땀을 손으로 닦아내면서 그는 여자에게 말했다.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제가 주장이다 보니깐...”

엔노시타 군.”

보고 있던 서류파일을 덮고 여자는 진한 갈색 눈동자를 들어 엔노시타를 빤히 바라봤다.

이제 인터하이는 지났고 듣자하니 주전도 아닌데 그만 하는 게 어떻겠어?”

그녀의 말에 엔노시타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안경 너머로 바라보는 그녀의 표정은 매우 객관적이고 냉철했다.

부모님도 진학하길 원하시고 1학년 때부터 쭉 보니깐 계속 진학을 원했잖아.”

뒤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엔노시타는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떨구고 구깃구깃해진 제 유니폼을 바라봤다.

 

엔노시타는 깜깜한 공간에 떨어졌다. 무대 위의 주인공처럼 그의 머리 위에는 이상하리만큼 밝은 조명이 떨어졌다. 움직이고 싶었지만 움직일 수 없었다.

재능 없는 거 알잖아.’

그 때, 누군가 엔노시타에게 속삭였다. 엔노시타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짙은 암흑만 깔려있을 뿐 그 누구도 보이지 않았다.

왜 집착하는데.’

다시 가까운 곳에서 들리는 음성에 엔노시타는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누구지. 보이지 않는 다는 것이 이리도 갑갑하고 무서운지 전에는 몰랐다. 입을 열어 누구냐고 묻고 싶었지만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누구냐고?’

목소리의 주인은 엔노시타가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는 듯이 재차 물었다. 떨리는 마음에 엔노시타는 침을 한 번 삼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 네 옆에 쭉 있었는데 모르는 거야?’

감도 잡히지 않았다. 모른다고 말하려고 목소리를 내려 했지만 나오지 않았다.

하하. 치카라, 이거 섭섭한데.’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엔노시타는 목이 갑갑해졌다. 끈적끈적하기도 하고 불쾌하기도 한 것이 목 근처에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느낌이었다. 시선을 내려 바라보니 자신의 옷에 무엇인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기분 나쁜 색들이 핏덩어리처럼 얽혀있는 액체는 엔노시타의 목과 어깨를 시작으로 끝 모를 아래로 떨어졌다. 엔노시타는 겁이 났다.

나는 너의 열등감이야.’

추상적인 감정이 말로써 형태를 입고 실체화가 되었다.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고개를 포기하고 엔노시타는 눈알을 옆으로 돌려 열등감이라고 지껄인 그 것을 바라봤다. 셀 수 없는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고 서로 엉겨 있는 덩어리는 자신의 상체 위로 떨어진 액체와 흡사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에 엔노시타는 급히 시선을 회수했다. 옆에서 작게 키득거리는 소리가 났다.

내가 싫어?’

그 것의 목소리에 엔노시타는 눈을 감았다. 뭐라 말하고 싶었지만 목이 죄여오는 느낌에 성대가 눌려 제대로 된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저 미개한 짐승이 본능대로 울부짖는 괴상하고도 음울한 그르렁거림이었다. 그런 엔노시타의 모습이 고깝다는 듯 그 것은 다시 지껄였다.

왜 열심히 하는 데? 주전도 못 달잖아.’

의표를 찌르는 그 것의 말은 엔노시타를 좀 더 삼키려했다. 울고 싶었지만 눈물이 나지 않았다. 그만해. 이미 속으로는 몇 번이고 외쳤지만 엔노시타의 목구멍에서는 언어가 나오지 않았다.

그냥 원래 네 모습으로 돌아와, 치카라.’

약한 부분을 손톱으로 살살 긁으면서 기괴한 아픔을 만들어냈다. 엔노시타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질러댔다. 점점 힘이 빠졌다. 어느새 액체는 엔노시타의 온 몸을 덮어 무엇이 엔노시타인지 그 것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눈을 감아. 그리고 모두 날려 보내.’

가시 같은 것이 엔노시타의 눈을 감쌌다. 투둑. 눈꺼풀이 가시에 찔려 피가 터져 나왔다. 눈물인지 피눈물인지 알고 싶지도 않은 것들이 액체와 함께 떨어졌다. 엔노시타는 점점 정신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자신은 먹히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한 가지를 확실하게 인식할 수 있었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배구를 하고 싶다.






2016.0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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