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흑] -16

pinn_pond 2016. 1. 21. 17:41


-16

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쿠로코는 살짝 손을 들었다. 가느다란 손가락 새로 빠져나가는 물을 보면서 물장구를 좀 치고는 손을 내리고 얼굴을 온천 속에 반만 집어넣었다. 물 위로 하늘색 머리카락과 눈동자만 내놓은 채 한숨을 폭 내쉬었다. 수면 위로 기포가 보글보글 올라왔다. 눈앞에서 공기방울이 올라오는 것을 말가니 지켜보던 쿠로코는 나머지 얼굴도 쑥 넣었다. 십초 정도 지났을까, 참았던 숨을 내뱉으면서 쿠로코의 작은 머리통이 물보라를 일으키며 바깥으로 나왔다. 뜨거운 물과 한껏 얼굴을 마주한 터라 전체가 다 화끈거리면서 녹신녹신했다.

머릿속에서 절대 빠져나오지 않는 생각이 다시 쿠로코를 쿡쿡 찔렀다.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으려 애쓸수록 코끼리만 생각난다는 모 실험처럼 잊고 싶었지만 잊을 수 없는 기억이 자꾸만 부풀려져 나타났다. 입술에 남아 본의 아니게 머금고 있는 온천수가 그 기억의 풍선을 바늘로 터뜨렸다.

다음에 또 해줄게. 기대해.’

생각의 파편이 수면 위로 솟아오르자 일렁이는 수면처럼 심장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따뜻한 온천물 때문에 상기된 쿠로코의 얼굴은 빨라지는 심장 덕에 열이 몰려 누가 봐도 새빨개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물에 담그고 있던 손을 들어 뺨을 만져보니 어째 손보다도 뺨이 더 뜨거운 거 같았다. 괜스레 부끄러워진 마음에 손을 들어 온천물을 만졌다. 찰박찰박. 조용한 온천장에는 사과사탕보다 더 붉어진 두 뺨과 물이 찰랑거리는 소리만이 자리를 잡았다.

사실 쿠로코는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이런 감정을 느낀 것도 이러한 감정을 느끼게 한 사람도 모두 처음이라 생소했다. 어쩔 줄 모르겠는 감정들이 지난 술자리와 카가미의 집에서부터 쿠로코를 쫓아다녔다. 어떤 감정으로 그가 자신에게 이런 행동들을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술자리에서 했던 키스는 실수로 치부할 수 있었다. 둘 다 술이 들어갔으므로 분위기를 타서 그랬다는 변명을 입힐 수 있었다. 그러나 카가미의 집에서 갑작스레 당했던 키스는 실수로 정의할 수 없었다. 분명히 그는 확고한 뜻을 담아 쿠로코에게 키스를 했다. 그 정도는 쿠로코도 알 수 있었다.

또 해준다는 건 뭐람. 쿠로코는 그렇게 말했던 그의 얼굴이 다시 떠오르자 애꿎은 온천물만 손으로 튕겨냈다. 그 날 카가미의 집에서 짧은 입맞춤을 한 뒤 이주 정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아니 그는 쿠로코와 딱히 만나야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카가미의 친구였을 뿐 쿠로코와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연락처도 알지 못했고 이야기를 많이 나눈 것도 아니었다.

그와의 사이를 냉정하게 생각을 하고나니 갑자기 기분이 울적해졌다. 부끄러운 감정을 느끼는 것도 싫었는데 키스까지 한 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결론이 내려지자 쿠로코는 입이 삐죽삐죽 나왔다.

쿠로코 테츠야에게 히무로 타츠야는 특별한 일 아니고서는 만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에 대한 생각으로 이주일째 속앓이를 하고 있었을 때, 운이 좋게도 그를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키세의 주최로 이루어진 이번 행사는 기적의 세대뿐만 아니라 그들의 파트너들도 참석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분명 카사마츠를 합류시키고 싶은 키세의 마음이 컸으리라 짐작했으나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암암리에 나머지 기적의 세대들도 파트너들을 챙기는 마음은 같았으니깐.

어쩌면 키세군에게 감사해야할지도.’

쿠로코는 처음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분명 그를 만나게 되면 이것저것 따질 거라는 생각과 다르게 히무로의 얼굴을 본 순간 그 때문에 고민했던 이주가 별거 아닌 게 되어버렸다. 검은 머리와 검은 눈동자를 보니 더는 마주 할 용기가 나지 않아 눈을 아래로 깔고 부리나케 숙소로 들어와 버렸다. 따라 들어온 카가미가 어디 아프냐고 물었고 쿠로코는 컨디션이 조금 안 좋다며 먼저 온천에 들어가면 나중에 가겠다는 말을 남긴 채 이불 속에 몸을 넣었다. 무리하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카가미가 방을 나가자 이불 안에 있던 얼굴을 빼꼼히 꺼내고 낮게 한숨을 흘렸다.

조금 자고나니 복잡했던 마음이 정리되는 느낌에 쿠로코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 온천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온천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미 다들 한바탕 온천을 즐기고 휴게실로 간 모양이었다. 히무로와는 마주칠 일이 없어진 게 안도되기도 하고 이상하기도 했다. 그래서 지금 쿠로코는 혼자서 온천에 앉아 걱정거리만 눈처럼 똘똘 말아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고 있었다.

드르륵.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쿠로코는 문 쪽을 쳐다봤다. 그렇지만 수증기가 가득한 온천장에서 시야를 확보한다는 건 무리가 있었다. 발바닥과 물이 만나 찰박거리는 소리가 들리면서 누군가 점점 온천 쪽으로 다가왔다. 이윽고 쿠로코가 앉아있는 온천에 물이 바깥으로 넘치면서 제 앞에 사람이 앉았다. 수증기가 점점 걷히면서 사람의 형체가 서서히 쿠로코의 시야에 들어찼다.

쿠로코는 속으로 숨을 삼켰다. 눈 밑에 보이는 점과 유려한 턱선을 가진 사람은 쿠로코가 알기론 오직 한 사람뿐이었다.

히무로 타츠야

입 밖으로는 내놓지 못한 그의 이름이 수증기와 함께 쿠로코의 목을 타고 내려갔다. 아까까지만 해도 히무로 생각 때문에 갈팡질팡 했는데 그가 앞에 나타나니 모든 생각이 무색하게도 자취를 감췄다. 살짝 눈을 들어 그를 바라보니 온천을 둘러싼 돌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은 채 앉아있었다. 쿠로코는 그를 의식하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신경이 쓰여 도둑질 하는 사람처럼 히무로를 힐끗힐끗 훔쳐봤다. 이런 쿠로코를 아는지 모르는지 히무로는 그저 온천을 향유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혼자 신경 쓰는 게 억울해진 마음도 들고 지치기도 해서 쿠로코는 온천을 나가기로 마음먹었다. 바깥 공기와 오래 닿은 차가워진 얼굴을 다시 온천 물 속으로 넣었다. 따뜻한 물이 얼굴을 어루만져주는 느낌에 기분이 약간 풀어진 쿠로코는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온천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누군가의 손에 의해 다시 온천 속으로 끌려갔다.

벌써 가려고?”

풍덩 소리와 함께 수면 위에는 물보라와 파동이 잔잔하게 일어났다. 그리고 제 앞에는 히무로가 웃고 있었다. 언제 이렇게 되었는지는 몰랐지만 쿠로코에게는 상당히 부끄러운 자세임은 분명했다. 앉아 있는 히무로 위에 올라탄 쿠로코는 눈에 가득 찬 히무로의 반라 때문에 마땅히 시선을 둘 곳이 없었다. 덤으로 민망한 자세를 하고 있는 저자신도 부끄럽기는 마찬가지였다. 본의 아니게 안긴 히무로의 품을 벗어나려고 움직였으나 간단하게 제지당하고 말았다. 꼼짝없이 잡혀버린 쿠로코는 차렷 자세를 한 채 히무로의 얼굴을 바라봤다.

쿠로코, 나는 말이야

말 끝을 기묘하게 늘이면서 히무로가 점점 쿠로코에게 몸을 밀착했다. 뜨끈한 두 나신이 습한 장소에서 서로 열기를 뿜어냈다. 늘 조각 같다고 여겼던 히무로의 턱과 목선을 따라 물방울이 떨어졌다.

너와 하고 싶은 게 많아.”

뭐 말입니까

. 어느새 잡힌 손가락에 히무로가 입을 맞췄다.

이거랑

다시 손등에 입이 맞춰졌다.

그리고 여기

살짝 비틀어 손목 안쪽에 길게 입을 맞추곤 얼굴을 떼지 않은 채 히무로가 눈만 들어 쿠로코를 바라봤다. 물기를 머금어 촉촉해진 머리칼 사이로 그의 새까만 눈동자가 쿠로코를 한아름 담고 있었다.

팔꿈치 안쪽에 한 번, 어깨에 한번, 목선을 따라 한번, 귀와 턱 사이의 움푹 패인 곳에 한번 그리고 뺨에 입을 맞춘 뒤 히무로는 쿠로코와 얼굴을 맞대고 가까워진 시선을 나눴다. 습하고 욕정 어린 시선이 쿠로코를 뜨겁게 바라봤다. 온천물에 담갔을 때보다 더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지 못한 쿠로코는 민망함이 몰려와 얼굴을 뒤로 빼려했다. 그러나 이어 들려오는 히무로의 낮은 음성에 꼼짝달싹 할 수 없었다.

약속했듯이 다시 여기에

촉촉한 입술 끼리 맞부딪혀 쿠로코의 입 안에 두 사람분의 혀가 얽혔다. 잔잔한 파동과 함께 두 나신은 점점 가까워졌다. 깊어지는 키스에 쿠로코는 자연스럽게 제 손을 들어 히무로의 어깨를 짚었고 그 행동이 마음에 들었다는 듯 살짝 웃으며 한 손으로 쿠로코의 허리를 껴안았다. 한참을 외설적인 소리가 온천장을 메꿨고 떨어질 줄 몰랐던 인영이 분리되었다. 쿠로코는 아직도 가쁜 호흡을 고르면서 자신보다 조금 아래에 있는 남자를 내려다봤다. 쿠로코를 바라보며 웃어주는 남자는 누구 것인지 알 수 없는 타액을 혀로 쓸었다. 이제는 정말 실수라고 치부할 수 없었다. 그것을 쿠로코 눈앞에 있는 남자가 똑똑하게 알려줬다.

마지막으로 이제 하나 남았어.”

?”

아직도 남아있습니까라는 말은 속으로만 생각한 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히무로를 바라봤다. 다시금 아까의 눈빛을 하며 다가오는 히무로는 쿠로코의 관자놀이에 짧게 입을 맞추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나랑 사귀자, 테츠야.”

 

 

 

 

 

 

2016.0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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