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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이즈미 하지메/오이카와 토오루
첫째로 내가 너의 뒷모습을 의식하게 된 것은 초등학교 때였다. 3학년 때까지 쭉 같은 반을 하다가 처음으로 너와 반이 떨어졌을 때 나는 참 많이 울었다. 어렸을 때부터 너와 함께 있는 것은 나에게 당연했고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모종의 확신이 나에게는 있었던 것이라고 지금은 생각한다. 아직 어려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이별에 우는 나를 너는 작은 손으로 등을 토닥이면서 달래주었다. 그 손이 너무 따뜻해서, 너의 위로가 너무 따뜻해서, 나는 그 자리에서 더 크게 엉엉 울어버렸다. 그제야 너는 작은 몸으로 나를 안아주었다.
나는 등하교는 꼭 같이하자고 약속을 하면서 다른 반으로 가는 너를 뚱한 얼굴로 그나마 보내줄 수 있었다. 하지메쨩 수업 끝나구 꼭 와야 해. 새끼손가락을 걸고 약속까지 하면서 너에게 단단히 다짐을 받아냈다. 너는 그런 나를 보고 안심해라고 말하며 철없는 나의 행동에 끝까지 장단을 맞춰주었다. 뒤돌아서 다른 반으로 가는 너의 모습을 본 나는 설움이 복받쳐서 애써 눈물을 꾹 참아봤지만, 내 반으로 돌아가는 내내 소리 없는 눈물방울이 눈에서 떨어졌다. 너의 뒷모습은 그렇게, 나에게 애달프게 다가왔다. 멀어져가면서.
너에 비해 나는 어렸을 때는 활발하지 못한 성격 탓에 친구가 많이 없었다. 가뜩이나 낯가림이 심해서 새로 만난 친구에게 말도 못 붙이는 나를 위해 너는 너를 통해 친구들을 만들어줬다. 너는 나의 첫 친구였으며 세상을 향한 첫 통로였다. 너는 나에게 그런 의미였다.
내 얼굴을 좋아한 같은 반의 여자애들이 나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 그 당시 어린 나는 수줍음이 가득해 제대로 말을 섞지 못했고 의도치 않게 무시를 하자 결국 한 여자애를 울리고 말았다. 나는 당황했지만 어떤 말도 할 수 없었고 오해조차 풀지 못했다. 너무 어렸기 때문에. 그 여자애를 좋아하던 같은 반의 남자애들의 시기를 한 몸에 받기 시작했다. 괴롭힘과 따돌림. 처음 당하는 나쁜 일이었지만 참을 수 있었다. 이 시간을 참으면 너와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나는 그 어떤 것도 견뎌낼 수 있었다. 그렇지만 결국 너에게 들키고 말았다. 그날은 평소보다 괴롭힘이 심해져 그 아이들이 내 옷을 찢어버렸을 때였다. 네가 나와 잘 어울리는 옷이라고 말해줘서 소중하게 여기던 옷이었는데 구겨지고 더러워졌었다. 학교를 마치고 나와 놀이터에 가던 너는 내 옷을 보고 처음 보는 화난 표정으로 나에게 설명하라며 다그쳤다.
그리고 다음날 나와 함께 등교한 너는 내 반으로 가서 나를 괴롭힌 애를 찾아 그대로 때려 눕혔다. 그 아이와 덩치 차이가 꽤 났지만 너는 끝까지 매달려서 그 아이를 한 대라도 더 때렸다. 하지메쨩.. 그만해. 엉엉 울면서 너를 말리는 나를 보고나서야 너는 주먹질을 그만뒀다. 숨이 찬지 씩씩거리면서 내 눈물을 닦아주는 너의 손은 뜨겁고 거칠었다. 아이들이 불러온 선생님에게 붙잡혀가는 너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는 너에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음에 다시 눈물을 흘렸다.
초등학교 고학년 때, 중학교 선배가 그저 내 얼굴이 맘에 안 든다는 이유로 나를 때리고 있을 때, 너는 어디서 듣고 왔는지 금세 나타나 나를 감싸 안고 나대신 모진 발길들을 다 견뎌냈다. 너는 입술이 터지고 살이 빨개졌지만 그 흔한 신음소리 한 번 내지 않고 나대신 그 모든 것들을 감수했다. 너무 많이 맞은 너를 보면서 우는 나에게 괜찮다며 손을 내밀고 웃으면서 나를 일으켜주는 너는, 정말 나에게 그 어떠한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너는 그렇게 나의 마음을 헤집어 놨다.
둘째로 너의 뒷모습에 의지했던 것은 중학교 때였다. 머리가 컸다고 이젠 이름이 아닌 성으로 부르자면서 이야기하는 너를 끝내 밀어내지 못해 쨩이라는 애칭을 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너는 정말 못 마땅해 보여 나는 큰 소리로 웃었다. 너 또한 이런 나의 모습을 보고 쿠소카와라며 똑같이 놀려줬을 땐, 너와 나는 생각하는 것이 비슷하구나. 라며 좋아했다.
중학교에 올라와 크게 달라진 것이 있다면 우리는 함께 배구를 한다는 것에 있었다. 초등학교처럼 학교가 끝나고 따로 스포츠 단에서 배우는 것이 아닌, 중학교에서 정식으로 부활동을 하게 되면서 너와 함께 더 있을 수 있었다. 우리는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배구를 습득하고, 마치 짠 듯이 서로에게 꼭 필요한 포지션을 맡게 되었다. 세터와 윙스파이커. 너와 나의 관계를 보여주는 적나라한 포지션이었다. 지겨울 법도 한 연습이었지만 너와 함께 호흡을 맞춘다는 것은 나에게 큰 의미로 다가와 배구 연습은 그 무엇보다 소중하고 즐거웠다.
2학년 때는 배구에 중독되어 다른 누구보다 늦게 남아서 연습하는 나를 끝까지 기다려주고 함께 연습을 하며 어울려주었다. 너는 심성이 따뜻한 사람이라 입은 거칠었지만 그 마음만은 비단결처럼 고왔다. 밤늦게까지 배구영상을 보면서 분석을 하는 것이 나에게 재미있는 일이었지만, 피로가 누적되어 과로로 나타났을 때 너는 걱정하는 마음을 숨기면서 나를 나무랐다. 네가 나를 나무라는 것이 나에게 보이는 관심으로 생각되어, 나는 너무 기뻐서 배구에 더 집중하고 많은 시간을 쏟아 부었다. 결국 너는 어쩔 수 없다는 듯이 내가 하는 보조에 맞춰서 함께 배구의 길을 걸어주었다.
3학년에 올라가고 같은 포지션의 1학년 후배가 새로 들어왔을 때, 나는 재능이라는 절망을 크게 느꼈다. 그 절망의 깊이를 알 리 없는 후배는 나에게 내가 알고 있는 배구에 대한 모든 것을 알려달라고 늘 쫓아다녔다. 귀찮기보다는 싫었다. 재능이 빛나는 후배를 보고 있으면 질투심과 배신감이 나를 덮쳐 끝 모르는 개미지옥으로 빠져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더 이상 다가오지 마. 선을 그었지만 후배는 무시했다. 경고를 무시하고 내 영역으로 억지로 들어오려는 후배를 보고 나는 그날 저녁 화를 참지 못하고 인생에서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려했다.
그때 나를 잡아 준 것은 너였다. 이와이즈미 하지메. 올곧은 눈은 나를 질책하지도 힐난하지도 않았다. 머리를 식히라면서 거칠게 내뱉은 너의 말과는 다르게 너의 눈은 나를 향한 걱정을 한가득 담고 있었다. 곪을 대로 곪고 썩을 대로 썩어서 더 이상 부풀지 않았던 내 상처는, 네 말로 인해 단숨에 꿰뚫어져 터져버렸다. 이제 중학생이 되어 더는 울지 않겠다는 당찬 포부는 어디로 갔는지 체육관을 나오자마자 목 놓아 울어버렸다. 후회와 부끄러움. 너에게 언제나 나는 못난 모습만 보여주는 사람인 것 같아서 서러웠다. 이번에도 나는 너를 의지하지 않으면 안됐다. 나와 후배 사이를 가로막은 너의 등은 듬직해보였고 기대고 싶었다.
며칠간 방 안에 틀어박혀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침대 위에 누워있는 나를 너는 억지로 집 밖에 끌고 나갔다. 그대로 놀이터에 끌고 가서 나에게 배구공을 던져주었다. 어렸을 때부터 우리가 자주 놀던 놀이터. 너와 나의 추억이 가득한 곳. 이곳에서 너와 내가 놀았으며, 이곳에서 너와 내가 배구를 처음 시작했다.
“오이카와, 여기서 네가 그 때 뭐라고 했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아니 사실 기억이 났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순수하고 깨끗했던 나의 마음이 언제 이렇게 더러워졌는지 굳이 상기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이렇게 퇴보하고 있는데 너는 한결같이 바르고 올곧았다. 너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입을 열었다.
“배구를 하면 행복해. 함께 하자. 너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어.”
하지메쨩, 토오루는 배구 하면 행복해. 하지메쨩도 행복해졌으면 좋겠으니 깐 같이 하자. 둘뿐인 놀이터에 조그만 아이 두 명이 보이는 것 같았다. 노란색 티셔츠를 입은 갈색 머리의 남자 아이와 검은 민소매를 입은 검은 머리의 약간 탄 피부의 남자 아이. 나와 너. 어린 시절, 배구공을 너에게 주면서 내가 건넸던 말이다. 그 말이 자꾸 귀에 맴돌아 더는 네 얼굴을 볼 수 없어서 몸을 돌렸다. 볼썽사나운 나의 모습들은 너에게 실망만 남겨주었다. 너는 나를 위로할 줄 알았지만 나는 너를 걱정하게 만들었다.
울지 않겠다며 입술을 꽉 깨물고 참고 있는 나에게 너는 괜찮다며 안아주었다. 너보다 약간 큰 나를. 나는 너에게 쓰러지듯이 안겨 또 다시 울고 말았다. 그때부터였다. 아마 그때부터 나는 너를 사랑했나보다. 아니 그 이전일 수도 있지만, 내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고 감정이라는 것을 확실히 정의 내릴 수 있다고 여겼던 이때가, 내가 너를 사랑하기 시작한 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너의 너른 등을 감싸 안고 참 많이도 울었다.
마지막으로 고등학교 때 너의 뒷모습을 보고 절망을 느꼈다. 고등학교에 들어와도 너와 나의 관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나도 너와의 관계를 바꿔보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너는 너이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었고 네가 아닌 너는 싫었다. 그리고 나로 인해 바뀔 네가 두려웠다. 나에게 아부만 하는 사람들과는 달리 쓴 소리를 마다하지 않는 너는, 내 주변사람으로부터 많은 욕을 먹고 손가락질을 받았지만 개의치 않아했다. 나를 올바르게 가르쳐주고 인도해주는 건 너 뿐이었다. 너 밖에는 할 수 없었다. 너이기 때문에, 내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너이기 때문에 가능한 모든 일이었다.
마지막 인터하이 예선전 무렵, 나는 나의 마음을 너에게 말하고 싶었다. 물이 흐르는 대로 자연스럽게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을 말하고, 물이 흐르는 대로 나의 마음을 보내주라고 하고 싶었다. 이제는 나보다 많이 작아진 너는 남들이 보기에 든든하지도 멋지지도 않았다. 다들 키가 크고 훤칠하게 생긴 나에게 멋있다고 했고 배구부 주장인 나에게 든든하다고 했다. 그러나 실상은 모든 것은 너였다. 너는 심지가 굳센 사람이었고 잔바람에 흔들리지 않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런 너를 좋아했고 너에게 이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 다른 사람은 너를 제대로 보지 않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너를 제대로 보고 있는 건 나뿐이라고 알려주고 싶었다.
그렇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았다. 떨리는 마음과 설레는 마음을 가득안고 너를 찾아가 십여 년 동안 눌러 담아왔던 나의 감정을 말하려했다. 날씨도 좋았고 기분도 좋았고 그냥 모든 것이 좋았다. 체육관에서 리시브 연습을 하고 있을 너를 머릿속으로 그리면서 평소 부르지 않던 노래를 흥얼거리면서 너에게로 갔다. 그리고 너를 봤다. 다른 것이 있었다면 네 옆에 내가 아닌 다른 사람.
흑갈색의 단발머리를 한 그녀는 아담하고 단정해보였다. 수줍은지 손을 모아 몸을 살짝 꼬는 모양새를 보면 마치 고백이라도 하는 것 같았다. 고백. 그것은 내가 해야 하는 고백. 그리고 다른 사람이 너에게 하고 있는 고백. 나는 멀리서 보고 있어 그녀의 입이 껌뻑거리는 거 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연분홍색 입술이 무엇인가 열렬하게 너에게 말하고 있었다. 퍽이나 그녀는 너와 어울려보였다. 나와는 다르게. 그녀는 아담하고 단정했으며 여자였다.
그녀가 말을 마치고 너의 대답을 기다리는 지 슬쩍 너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의 등 밖에 보이지 않는 나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너의 등은 움직이지 않았다. 살짝 보이는 네 입이 어떤 말을 하려고 떨어지려 했을 때, 나는 더 이상 보지 못하고 그대로 도망갔다. 네 얼굴이 무슨 표정을 지을지, 네 입이 어떤 대답을 할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너를 볼 자신이 나에겐 있지 않았다.
네 뒷모습은 절망 그 자체로 나에게 다가왔다. 그 등은 더는 나에게 버팀목이 되지 못했고 나를 비웃기라도 하는 듯 마음을 짓밟았다. 아니 너는 나에게 그 어떤 것도 하지 않았다. 나 혼자 실망하고 혼자 절망하고 혼자 울면서 혼자 내 마음을 힐난했다. 스스로를 상처 주는 방어적인 나의 마음을 뿌리치고 나는 너에 대한 내 마음을 보호했다. 네 등에 기대고 싶었고 네 등에 속삭이고 싶었다. 나도 고백하고 싶었다고. 사실은 너를 사랑했노라고.
“나 오사카로 가기로 했어.”
추천서가 왔어. 모두가 하교한 둘뿐인 교실에서 네가 나에게 먼저 말을 붙였다. 네가 먼저 말 걸어주는 게 숨 막힐 정도로 기뻤지만, 뒤이어 나온 말은 정말 나의 숨을 막히게 했다. 언제나 함께 하는 것이 아닌 거야? 당장이라도 네 몸을 흔들면서 너를 다그치고 싶었지만, 너는 너무 소중한 존재라 감히 내가 만질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하는 미래를 그리는데, 너는 그게 아니었다보다. 나만 하는 생각과 나만 가지는 감정이었나 보다. 이제 너와 함께 할 수 있는 시간은 네 달 남짓. 하지만 내가 스스로 망친 너와의 관계로 인해 네 달도 남지 않음에 속에서는 피눈물이 났다. 칼로 난도질 된 마음에는 붉은 생채기와 검붉은 딱지들이 자신들을 돌아봐 달라며 소리 지르고 있었다. 너를 향하지 않는 나의 마음은 필요 없어. 나는 속에서 울부짖는 그들을 무시했다.
아무 말이 없는 나에게 너는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한 것인지 내 앞에 앉아 내가 말할 때 까지 기다려 주었다. 너의 배려에 눈물이 나려했다. 언제나 너는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너로 인한 눈물은 나에게 마약과도 같아 찢어지는 마음속에서도 너의 관심이 기뻐 울면서도 웃었다. 손가락질해도 좋았다. 나는 너를 사랑하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그것이 네 손가락질이라 해도 나는 달게 넘길 수 있었다. 너이기 때문에.
“잘..됐네..”
목구멍과 뇌에서 그 말이 아니라고 나를 말렸지만, 혀는 내 마음과는 다르게 그를 축복해주고 있었다. 축복일까. 저주. 저주. 나에 대한 저주. 행복하지 못할 거야. 그가 없으면 너는 행복하지 못해. 나를 바라보고 있는 네 뒤에서 어린 내가 나를 손가락질 하면서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소유하고 싶잖아? 그를 가지고 싶잖아. 고백하고 싶잖아. 사랑받고 싶잖아. 어린 나는 비웃으면서 너에게 한 걸음 내딛지 못하는 나를 욕하고 저주했다. 아하하, 병신 토오루. 너는 이제 그를 다시는 못 만날 테야. 목을 젖혀 웃는 어린 나의 입 속은 지옥의 그것처럼 새빨갰다.
“그게 끝이야?”
“..응?”
“그거 밖에 할 말 없어?”
아, 너는 이미. 새삼 다시 느껴지는 너의 따뜻함에 왈칵 눈물이 났다. 어느새 나를 비웃고 있던 어린 나는 사라지고, 볼이 빨갛고 피부가 새까맣게 탄 어린 네가 네 뒤편에서 나를 바라봤다. 예나 지금이나 다름없는 너의 시선에 나는 그 자리에서 모든 것이 발가벗겨진 기분을 느꼈다. 너의 앞에선 늘 이랬다. 네가 무슨 말을 나의 입에서 듣고 싶은지 이미 눈치를 챘지만 나는 말할 수가 없었다. 너를 잃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네 입에서 나를 부정하는 말이 나오지 않기를 원했다. 너는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알면서도.
입을 꾹 다물고 울기만 하는 나를 너는 바라만 보다가 이내 의자에서 일어났다. 네 뒤에 있던 어린 시절의 너는 슬픈 눈으로 나를 쳐다보고는 나에게 등을 보인 채 뒤돌아 사라졌다. 가지마, 하지메쨩. 들릴 리 없는 말을 마음속으로 외치고 또 속으로 울었다. 눈물이 가린 희뿌연 시야로 너를 제대로 바라볼 수 없었지만 반짝이는 너의 눈만은 또렷하게 보였다. 응? 눈빛으로 재차 묻는 너에게 나는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네가 있던 자리에 네가 없어서 나는 서러움이 복받쳐, 책상에 팔을 올려 얼굴을 묻고 내 추악한 감정이 담긴 눈물을 쏟아냈다. 이도저도 아닌 나는 네가 마지막으로 준 기회마저 없던 걸로 해버렸다. 용서해줘. 나를 용서해줘. 너를 사랑하는 나를 용서해줘. 너를 바라본 나를 용서해줘. 이미 떠나버린 자리에 들어줄 사람 없는 말이 흩어져서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디선가 다시 깔깔대며 조롱하는 소리가 들렸다. 병신 토오루.
너의 넓은 등이 생각났다. 나의 앞에서 나만을 위해 보여주던 너의 등. 사랑한다는 감정으로 표현할 수 없는 나의 찢어진 그것들이 내 앞에서 나를 비웃듯이 춤을 췄다. 찢어진 그것에는 검붉은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다 타버린 잿더미 위에서 마지막 남은 너에 대한 감정이 처연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그곳으로 기어가서 너를 너에 대한 감정을 주워 가슴에 끌어안았다. 네 등처럼 따뜻했다. 닳고 달아 빠진 감정이 빛을 잃어가고 있었지만 나에게 마지막으로 남은 너이기 때문에 소중했다. 너라서.
나를 용서해줘. 너를 사랑하는 나를 용서해줘. 아직도 너를 바라보는 나를 용서해줘. 너만 사랑하는 나를 용서해줘. 너밖에 사랑하지 않는 나를 용서해줘.
2015.10.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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