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츠키] 28

pinn_pond 2015. 11. 18. 21:40


28

쿠로오 테츠로/츠키시마 케이

 

 



츠키시마가 가장 좋아하는 일과 중 하나는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는 일이었다. 남들이 생각하기에는 그다지 특별한 것이 없는 풍경이었지만 츠키시마에게는 특별했다. 매일 같지만 다른 모습을 한 사람들, 가끔씩 보이는 새로운 사람들과 사계절을 따라 바뀌는 사람들의 옷모양새도 츠키시마에겐 새롭게 다가오는 부분이었다. 밖을 바라보는 것이 좋았다. 그가 경험할 수 없는 미지의 세계가 창이라는 얇은 칸막이 너머로 펼쳐져 있었다.

그렇지만 츠키시마는 그 세상으로 나갈 수 없었다. 츠키시마에게는 그 사람이 있었다. 그는 츠키시마가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을 때부터 늘 함께였다. 그는 츠키시마를 소중하게 여겼고 돌보았고 예뻐 해줬다.

츠키, 내 달. 갔다 왔어.”

찬바람이 갑자기 들어와 몸이 부르르 떨렸다. 츠키시마는 몸이 약한 편이라 작은 찬기에도 기침을 했고, 그것은 그 사람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그는 입고 있던 트렌치코트를 벗어 옷걸이에 걸고 창문 앞 안락의자에 앉아있는 츠키시마에게로 다가왔다. 촤악. 커튼이 쳐지면서 츠키시마와 바깥을 연결하고 있던 실이 툭 끊어졌다. 촛불이 꺼지듯이 츠키시마의 눈에서 무엇인가가 꺼져갔다.

그는 츠키시마의 하얀 손을 붙잡아 일으키더니 조심스럽게 자신이 원하는 방향 쪽으로 끌어갔다. 찬 바닥에서 한기가 올라와 발이 시렸지만 츠키시마는 인상한번 찌푸리지 않고 그가 이끄는 대로 자신의 몸을 맡겼다. 안기듯이 끌려온 곳은 침실이었다. 둘이 쓰기에 약간 커 보이는 침대에 츠키시마만 앉힌 채 남자는 그 앞에서 츠키시마를 바라봤다. 빤한 시선이 부끄럽지도 않은지 츠키시마는 미동도 하지 않고 초점 없는 눈으로 그를 바라봤다.

츠키시마의 손을 잡아 쓸었다. 뼈가 도드라지게 올라와 있는 하얀 손은 서늘한 비단뱀의 피부와 같아 부드러우면서도 투명했다. 굴곡진 츠키시마의 손마디를 훑으면서 그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고 츠키시마의 손을 자신 쪽으로 잡아끌었다. 내 달. 그는 달이라는 어감이 좋은지 츠키시마라는 말 대신 츠키시마를 달이라고 종종 표현했다. 츠키시마는 그것이 싫지도 좋지도 않았다. 그냥 감정이나 생각이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정도로 남자가 주는 애정을 받아들이기만 했다. 그렇다. 받아들이기만 했다.

 

남자는 제시간에 일어나 제시간에 나갔다. 나갈 채비를 마친 남자가 현관문을 나서는 순간, 츠키시마는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다급한 발걸음으로 창문 앞에 있는 안락의자로 갔다. 푹신한 의자에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니 오늘은 비가 내리고 있었다. 거리에 형형색색의 다양한 우산들이 서로 부딪히기도 하고 비켜가기도 하면서 분주하게 자신들이 갈 길을 가고 있었다. 때때로 무늬 있는 우산이 지나갈 때면 골목길 저편으로 지나갈 때까지 시선이 함께했다.

제법 비가 많이 내리는지 움푹 패여 있는 길가에 물웅덩이가 조금씩 생겼다. 사람들이 그 웅덩이를 피해 다니려 겅중겅중 소금쟁이처럼 걷는 것이 츠키시마에게는 퍽이나 웃겨보였다. 무표정이었던 얼굴에 약간 화색이 돌아 방안의 온도가 올라갔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온통 무채색이던 츠키시마의 마음 한편이 점점 작은 색들로 채워지고 있었지만,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츠키시마 본인조차도.

사실 오늘따라 더 바깥풍경이 흥미진진했다. 비오는 날이더라도 평소처럼 잔잔하게 흘러갔지만 유독 오늘따라 츠키시마 입장에서 바라보면 사고들이 많이 일어났다. 급하게 뛰어가던 여학생과 부딪힌 회사원, 작은 웅덩이에서 물장구를 치던 조그만 아이들, 지나가던 차가 웅덩이에서 물보라를 뿜어내 몸이 다 젖은 남학생 등 제법 자그마한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다. 시종일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츠키시마는 처음으로 몸을 창문 쪽으로 기울여 바깥을 더 자세히 바라보았다.

전보다 시야에 크게 들어오는 풍경에 츠키시마는 순간 숨을 참았다. 조금만 움직였을 뿐인데 받아들여지는 이미지는 예전과 큰 차이가 있었다. 보이지 않았던 돌담에 앉아있던 고양이들과 대문에 붙어있는 문패, 아이들이 웃는 얼굴이 확대경으로 본 마냥 눈에 들어왔다. 자세히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많다는 것을 츠키시마는 열여섯 해 만에 처음으로 알았다. 가슴이 콩닥거리면서 뛰는 것 같았다. 츠키시마는 지금 설렘이라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바깥 구경에 빠져있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토록 한 곳에 집중하는 일은 이전에도 없던 것이라 정작 중요한 것을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것이 츠키시마에게 어떤 파장을 가져올지 아무도 몰랐다.

짜악-. 공기가 찢기는 소리가 거실에 울려퍼졌다. 온종일 창밖만 바라보던 츠키시마의 얼굴이 처음으로 다른 곳을 향했다. 뺨이 부어오르고 생리적으로 눈물이 흘러 볼을 타고 내려갔다. 눈을 들어 자신을 때린 사람을 바라봤지만, 츠키시마가 쓰고 있던 안경이 마찰을 견디지 못해 저만치 날라 가서 형체만 희뿌옇게 보일 뿐이었다. 그렇지만 상대방이 누구인지는 또렷이 알 수 있었다. 이 집에 출입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사람. 쿠로오 테츠로. 바로 그 남자였다.

내 달, 내가 왔는데 어딜 바라보는 거야?”

쿠로오는 분명 웃고 있었지만 그의 표정과 말투에서는 분노가 새어 나왔다. 츠키시마는 아픔이라는 직접적인 감정이 낯설었다. 쿠로오가 여태까지 츠키시마에게 손찌검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츠키시마가 쿠로오를 화가 나게 할 일을 하지 않았으나 애지중지 여기던 츠키시마를 폭력적으로 대한 것은 처음이었다. 쿠로오는 츠키시마의 반대편 뺨을 어루만지더니 다시 한 번 세게 내리쳤다.

너는 나만 바라봐야해.”

넝쿨이 츠키시마를 다리 밑에서부터 올라와 목 언저리까지 휘감아서 조르는 느낌이었다. 목이 답답하고 두 뺨이 얼얼했지만 츠키시마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츠키시마는 말하는 법을 몰랐다. 그는 츠키시마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아 말도 가르치지 않았다. 사고로써 자신의 생각을 나열하는 것은 할 수 있었으나 표현하는 것을 배우지 못했고 쿠로오에게 말로써 감정을 전달하지 않아도 됐다. 쿠로오의 목덜미에 얼굴을 부비거나 그의 손길이 이끄는 대로 행동하는 것으로 대답했다.

으으..”

츠키시마의 입술에서 짐승의 울림소리와 같은 것이 나왔다. 자신의 아픔을 호소할 방법을 찾아 할 수 있는 유일한 행동을 츠키시마는 처음 음성으로써 표현했다. 옅은 색 머리가 가늘게 떨리면서 애처롭게 흐느꼈다. 그러나 떨어진 고개는 쿠로오의 손에 의해 다시 들어 올려졌다. 희미하지만 자신의 눈에 보이는 쿠로오는 아무런 표정도 없었다.

나를 바라봐.”

담담한 어조와는 다르게 턱을 쥔 그 남자의 손은 힘이 세게 들어가 있었다. 눈물은 쉴 새 없이 흘러 턱을 쥔 남자의 손까지 적셔갔다. 아파. 나 아파. 왜 아파야해. 츠키시마는 눈을 감았다.

내 달. 츠키.”

달콤한 악마의 속삭임이 츠키시마의 눈을 뜨게 만들었다. 턱을 쥔 손이 약해지더니 이내 남자가 멀어져갔고, 츠키시마는 남자의 행동을 자세히 보려는 듯 눈을 찌푸렸다. 제법 선명하게 보이는 남자는 거실 저편으로 나가떨어진 츠키시마의 안경을 주웠다. 검정색 뿔테 안경은 알 한 쪽이 충격을 이기지 못해 금이 가있었다. 잘 어울리는 구나, 츠키. 남자가 처음 안경을 사다주면서 했던 말이 갑자기 들리는 것만 같았다.

그런데 츠키. 이제 이거 필요 없지 않아?”

무슨 말이지. 남자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츠키시마는 아직도 눈을 찌푸린 채 남자의 표정을 살피려고 애를 썼다. 콰직. 그리고 또다시 소리가 났다. 이번엔 찌푸리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남자는 츠키시마의 눈앞에서 안경을 박살냈다. 깨진 안경알이 쿠로오의 살을 파고들어 어느새 방울방울 피가 맺혀 카페트 위로 떨어졌다. 그렇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손을 펴서 츠키시마 눈앞에 안경의 잔해들을 떨어트려 보여줬다.

나만 바라봐야하는데 다른 것을 쳐다 볼 거라면 필요 없어.”

한 발짝 남자가 츠키시마에게 다가간다. 이제는 눈을 찌푸리지 않아도 남자의 형태가 또렷하게 보였다. 남자는 웃고 있었다. 쿠로오는 웃고 있었다. 츠키시마의 빨갛게 부어오른 뺨을 살짝 말아 쥐고는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적당한 감촉에 츠키시마의 볼은 혈액순환이라도 되는 듯 맥박이 쿵쿵 뛰었다. 남자의 얼굴이 다가오고 곧이어 입술이 맞부딪혔다. 짧은 입맞춤은 오로지 행위에만 집중되어 그 의미가 없었지만 남자는 굉장히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가까이 다가가면 나는 보이잖아. 그러니깐 저건 필요 없어. 내 달. 나만 바라봐.”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츠키시마는 처음으로 쿠로오의 행동에 대해 의문이 생겼다. 그가 주는 사랑에만 익숙하던 인형은 별것 아닌쿠로오의 입장에서일에 처음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 . 어째서. 눈앞이 보이지 않는 것이 큰 용기가 되었는지 자신을 바라보라며 재촉하는 남자의 말을 무시하고 고집스레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다시 올 아픔에 대한 겁을 미리 다스리면서 본인이 자각하지 못한 반항이라는 행동을 했다.

남자는, 쿠로오는 자신을 보지 않는 츠키시마의 얼굴을 다시 내려칠까 하다가 머리채를 잡고 끌고 가는 쪽을 선택했다. 감정이 생긴 인형은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 혀를 한번 차고는 옅은 색 머리칼을 쥐어 잡아 바닥으로 내동댕이쳤다. 차가운 대리석 바닥과 츠키시마의 몸뚱이가 거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고 널브러진 츠키시마의 머리채를 다시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파하는 츠키시마의 얼굴을 보는 것은 제법 즐거웠다.

침대 위로 던져진 츠키시마는 으으 거리는 소리만 낼 뿐 어떤 몸짓도 그에게 할 수 없었다. 그의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압박감에 짓눌려 숨이 막혀 가슴께가 아프고 호흡이 거칠어 졌다. 쿠로오는 몸을 웅크리고 있는 츠키시마를 바라보더니 이내 침대 위로 올라가 츠키시마의 배 부근에 올라탔다. 무표정하게 자신을 바라보는 그를 더는 쳐다 볼 수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 나는 당신이 하라는 대로 다 했는데.

목이 조여 왔다. 성인 남자의 악력은 무엇에 비견할 것이 못되어 츠키시마는 자신의 목을 잡고 있는 남자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겹치려 애썼다. 덜덜거리면서 올라가던 손은 힘없이 툭 떨어지고 다시 차오르는 눈물과 벌어지는 입을 통제할 수 없었다. 반항할 수 없어. 오래전부터 츠키시마에게 각인되어 온 남자와의 관계가 그에게 속삭였다. 전신에 힘이 풀렸다. 힘들게만 느껴지던 남자의 손길이 이제는 익숙해졌는지 무감각해졌고, 츠키시마의 눈은 이미 제 색을 잃고 빛마저 잃어가고 있었다.

더는 움직이지 않는 츠키시마를 보고 쿠로오는 흡족했는지 하던 행동을 멈추고 츠키시마를 끌어안았다. 제 품에 안기는 가느다란 몸이 차가워서 그는 자신의 온기로 츠키시마를 덥혀주려 했다. 아무 반응 없는 츠키시마에게 그는 속삭였다.

내 달. 너무 아름답구나.”

 

달빛이 아직 침대 위를 내리 쬐고 있을 때, 츠키시마는 불현 듯이 눈을 떴다. 처음이었다. 그 남자와의 정사 뒤에는 츠키시마의 가녀린 몸이 견디지 못해 다음날 정오까지 기절하듯이 자곤 했다. 한번 떠진 눈은 쉽사리 감기지 않아 츠키시마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다리 사이에 무엇인가 흐르는 느낌이 들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저 지금 자신의 위로 내리 쬐는 달이 좋았다. 서늘한 달의 느낌. 자신의 이름 츠키. . .

남자가 부르던 소리를 따라 해보려 목을 울려봤지만, 목 안에서만 맴돌 뿐 입 밖으로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았다. 제 이름도 말하지 못하는 제 자신이 부끄러웠다. 원래라면 전혀 들지 않을 법한 생각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새삼스레 가지는 감정들에 츠키시마는 혼란스러웠지만 싫지는 않았다.

잠꼬대를 하는 건지 자신의 품을 떠난 츠키시마를 쿠로오가 찾았다. 앉아있는 츠키시마의 배를 끌어안은 그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는 다시 꿈의 나락으로 빠지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런 남자를 바라보면서 츠키시마는 다시 생각했다. 목을 조르던 손. 안경을 부러뜨린 손. 두 뺨을 내리쳤던 손. 머리채를 잡았던 손. 자신을 내던진 손. 웃는 눈. 무표정한 눈. 분노한 눈. 웃음기 어린 목소리. 비웃음 서린 목소리. 감정 없는 목소리.

불현 듯 츠키시마는 남자가 몸서리치도록 싫어졌다. 그와 동시에 그가 자신에게 사랑을 주기를 원했다. 자신을 때리는 남자가 싫었고 자신만을 바라보라던 남자가 만족스러웠다. 그래도 창밖을 보고 싶었다. 자신에게 주어진 유일한 소통의 창. 츠키시마는 남자에게 속박되고 싶었고 탙출 하고 싶었다. 자고 있는 쿠로오의 검은 머리칼을 매만지다가 세게 쥐어봤다. 무표정한 츠키시마의 눈이 남자를 내려다봤다.

자고 있는 남자는 평온해 보였다. 남자의 길고 굵은 목에 츠키시마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다가갔다. 한 손에 잡히지 않는 남자의 목에 자신의 손가락을 감아봤다. 자다가 침을 삼키지 남자의 목젖이 울렁거리는 것이 손을 타고 전해졌다. 두근두근. 살짝 떨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 남자의 목을 압박하려했을 때, 뒤척이는 남자의 행동에 서둘러 손을 뗐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모르는 남자의 얼굴은 보기에 역겨웠다.

츠키시마는 다시 목을 조르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당신이 내 목을 부러트렸어. 내 목을 당신이 부러트렸어. 츠키시마는 손을 자신의 목에 가져다 댔다. 맥박이 쿵쿵 뛰는 것이 느껴졌고 제법 따뜻했다. 가녀린 목에 감싸 쥔 손은 서서히 압력이 가해졌고 목을 타고 전해지는 아픔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더 이상 공기가 들어오지 않아 머릿속이 뿌옇게 흐려졌을 때, 츠키시마는 손을 떼고 몸을 틀어 창밖의 달을 바라봤다.

손자국이 벌겋게 난 목을 달빛이 비춰주고 있었다. 달을 한번 쳐다보고 츠키시마는 내면에서 올라오는 생각의 뿌리를 뽑아버렸다. 감정을 지웠다. 츠키시마는 달에게 등을 돌리고 쿠로오의 품으로 들어갔다. 훅 끼쳐오는 쿠로오의 체향을 맡으면서 츠키시마는 마지막으로 생각이라는 것을 했다.

부러트렸다. 내 목을. 당신이 부러트렸다. 나를. 네가.

 






2015.11.18.

for d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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