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노후타] 31

pinn_pond 2015. 12. 6. 00:36


31

엔노시타 치카라/후타쿠치 켄지

 

 

 

 

오늘은 내 손으로 너, 엔노시타 치카라를 묻은 지 2년째 되는 날이었다. 너는 갑작스레 나를 떠났다. 내가 너를 떠나보낼 마음에 준비를 가지게 하지도 못한 채 너는 평온한 미소 하나만 짓고는 나에게서 떠나갔다. 연고지 하나 없는 너를 내 손으로 차갑게 식은 땅에 묻을 때, 나는 너에 대한 내 마음도 같이 묻어버렸다고 자부했다. 그러나 너는 지옥에서 돌아온 것 마냥 나를 끈질기게 붙잡았다.

그 붙잡음에 돌연 크나큰 만족감을 얻어서 나는 아직도 너를 못 잊음이 그렇게도 좋았다. 아직도 너를 사랑하고 있는 나라는 사람이 뭐라도 된 것 같이 대단해보였고 사별했음에도 다른 이와 사랑하지 않고 너를 생각하는 나에 대해 우쭐한 감정을 느꼈다. 오로지 나만을 위한 이기적인 생각으로 너와 마지막 남은 추억을 비틀고 훼손시켰다. 네가 잠들어 있는 무덤 앞에서도 가식적인 눈물을 흘리면서 네가 보고 싶다. 그립다. 이런 말 따위를 하면서 만족감을 느꼈다. 나는 아직까지도 널 생각해. 그 감정이 좋았다.

한 달, 두 달, 반년, 일 년. 시간이 점점 흐름에 따라 너에 대한 감정도 기억도 모두 바스라지고 있었다. 나만을 위해 생각했던 너에 대한 감정들은 더 이상 나에게 필요하지 않아 구석에 몰아놓고 방치해버렸다. 더는 네 무덤 앞에 가지 않았으며 너에 대한 거짓된 생각으로 눈물을 흘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렇게 너를 잊어갔다.

 



여행을 가기로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는 아니었다. 하고 있던 일에 신경을 쏟아 부으며 마무리를 지었던 터라 몸도 마음도 많이 상해있었다. 맡았던 일이 좋은 방향으로 풀리게 되어 회사에서 상여금과 한 달이라는 무지막지한 휴가기간을 주었다. 처음에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집에서 빈둥거리며 시간을 소비하다가 우연히 친구가 소개해준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참으로 간단한 여행이었다. 그저 여행사에서는 바이크 한 대와 여행 루트만 짜줬을 뿐이고 시간에 대해서는 일절 관여하지 않는 다는 것이 계약 조건이었다. 나름 다른 사람의 간섭을 싫어하는 나는 그 자리에서 계약을 했고 그렇게 이번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가는 날씨라 부가적인 걱정을 덜 수 있었다는 것이 장점이라면 장점이었다.

뭐 어찌됐든 오랜만에 떠나는 여행이라 기분이 무척이나 좋았다. 평범한 일상에서 기억에서 그 밖의 모든 것에서 일탈할 수 있는 것만큼 짜릿한 일은 없다고 나는 생각했다. 여행사에서 바이크를 받아 시동을 걸고 도로를 내달리자 나를 맞서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아직 짙은 녹색으로 꾸려져있는 가로수의 색감도 좋았고 따갑지만 시원한 바람과 함께 내리 쬐는 햇볕도 좋았다. 회색의 콘크리트 벽만 보고 내달렸던 요 몇 달이 보상되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달려서 도착한 곳은 어느 시골의 민박집이었다. 나를 맞아주는 주인 할머니의 미소가 따뜻해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던 것 같다. 씻고 나오면 저녁을 차려주겠다는 할머니에게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고는 짐을 풀러 오늘 묵을 방으로 들어갔다. 정갈하게 깔려진 이불이 나를 맞이해 주었고 방 한편에 마련된 화장실에 들어가서 오늘 하루 종일 뒤집어썼던 먼지를 털어냈다. 개운해진 상태로 화장실을 나가니 방 한가운데 있는 탁자 위에 방금 찐 것 같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옥수수가 있었다. 주인 할머니의 배려에 그만 웃음이 나와 버렸다.

막 찐 옥수수를 들고 툇마루에 걸터앉았다. 간간히 들리는 귀뚜라미 우는 소리와 바람에 나뭇잎 스치는 소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툇마루에 걸친 발을 앞뒤로 흔들면서 옆에 놓여있던 따끈한 옥수수를 한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나는 옥수수를 도저히 씹어 삼킬 수 없었다.

 

켄지, 옥수수 먹어봐. 옥수수는 여름에서 가을로 넘어갈 때가 제일 맛있어.’

 

갑자기 스치는 기억에 목구멍부터 거부감과 울컥거림이 밀려와 나는 그대로 옥수수를 뱉어냈다. 주인 할머니께서 보내주신 따뜻한 마음을 느낄 새 없이 나는 다시금 나의 문을 두드려 대는 기억에 더는 툇마루에 앉아있을 수 없어 자리를 정리하고 일어났다. 옥수수 그릇을 집어 드는 내 손이 작게나마 떨렸던 것은 죄책감일까. 나는 더는 어떠한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아 그대로 불을 끄고 이불 속으로 들어가 이른 시각에 잠을 청했다.

 



아침에 일어나 어제 넘기지 못했던 옥수수를 깨끗이 비워내고 아침 일찍 민박집을 나섰다. 주인 할머니는 아침밥이라도 먹고 가라며 나를 잡았지만 그 방에 있을 자신이 없어서 괜찮다는 말만 남긴 채 길을 떠났다. 어제보다 마냥 가볍지만은 않은 마음이었지만 여행의 목적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나를 재충전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 지금 나에게 필요한 것들을 상기하고 그것에 맞춰 이루어내려는 노력을 했다. 여행사가 추천해준 루트는 제법 알차서 주변에 있는 작은 신사와 박물관 그리고 간간히 요기를 때울 수 있는 찻집을 두루 다닐 수 있었다. 고즈넉한 신사에 들어가서는 자연 경관을 보면서 마지막 저물어가는 여름을 만끽 했으며 찻집에 들어가서는 경단과 녹차를 마시면서 바이크 때문에 경직된 근육을 이완시켰다.

차를 마시고 기분 좋게 나머지 일정을 즐기러 바이크를 몰고 십 여분정도 달리고 있을 때, 갑자기 소나기가 내렸다. 때 아닌 비에 우산이나 우비를 챙겼을 리 없을 나는 내리는 비를 쫄딱 맞으면서 여행사에서 정해준 다음번 숙소로 목적지를 바꿨다. 다행인 것이 숙소가 꽤나 가까워서 옷이 많이 젖었지만 나름 추위를 안타는 체질이라 괜찮았다. 이번에 숙소는 꽤나 큰 여관으로 온천도 겸하고 있는 터라 주인장은 내 꼴을 보자마자 방을 안내해준 다음 온천 입구를 알려주었다. 배려해주는 마음에 감사하다는 인사를 하고 주인장이 건네준 수건으로 머리와 몸을 대충 닦은 다음 메고 있던 가방을 내려놨다.

속 안까지 젖지 않아서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가볍게 저녁식사를 한 다음 온천이 생각이나 그래도 차가워진 몸을 풀어야겠다는 마음이 들어 온천으로 걸어갔다. 허리에 수건을 한 장 두르고 온천으로 들어가니 온천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 고요함이 좋아 나는 바로 뜨끈한 온천물에 몸을 담갔다. 아직도 밖에는 비가 내리는지 처마를 타고 흐르는 빗방울이 떨어지면서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 냈다. 비로 인해 차가웠던 몸이 풀어지면서 점점 기분이 나른해 졌다. 후두두둑 소리를 내면서 갑자기 비가 세차게 내리기 시작했다. 위에 지붕이 있어서 비가 많이 온다 하더라도 지장이 없었지만 거기에 바람이 더해진다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휘몰아치는 비바람에 그만 다시 잊고 있었던 생각이 났다.

 

바람이 많이 불 때 온천에 오래 앉아 있으면 안 돼. 들어가자, 켄지.’

 

세찬 바람을 타고 밀려오는 너의 목소리에 울음이 나올 뻔한 걸 어거지로 참아냈다. 왜 갑자기 네가 생각나는 걸까. 아무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나의 물음은 나마저도 할 말이 없게 만들었고 조금씩 내 마음에 자리를 잡으려는 너 때문에 찬바람을 맞고 있던 얼굴을 온천물 속에 집어 넣어버렸다. 뜨거운 물이 얼굴을 잠식해나가자 너에 대한 생각들이 희미해지는 것만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던 것 같다.

그날 악몽을 꿨다. 자세한 꿈의 내용은 기억해낼 수 없었지만 안 좋은 꿈이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땀이 범벅인 채로 깨어난 것은 그다지 좋은 일이 아니라 그날 하루는 여행을 쉬기로 했다.

 



그 일이 있은 뒤로 너는 나를 더 이상 찾아오지 않았다. 처음에는 왜일까 의문을 가지기도 했지만 너를 서서히 잊어버린 것처럼 순간순간 네가 생각났던 지난 여행은 역시나 시간에 치여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일탈이라는 여행도 반복되다 보면 순식간에 일상이 되어버려 지겨워지기 마련이었다. 나 역시도 계속되는 여행에 꽤나 지쳐있었고 주변에 지나가는 풍경도 건물들도 더는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무의미한 일상 중 하나가 되어버린 여행을 이제 마무리 짓기로 생각하면서 나는 마지막이 될 숙소로 갔다. 여태까지 묵어왔던 숙소와는 다르게 게스트하우스 형식으로 3인실이 대부분인 공용 숙소였다. 배정받은 침대에 가방을 내려놓고 걸터앉은 채 손을 들어 얼굴을 쓸어 내렸다. 한숨이 짙게 나오는 입가에 손을 대고 애써 피곤함을 잊어보려 했다. 내일이면 이 여행도 끝이다.

날이 어두워지자 같이 방을 쓰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들어와 짐을 풀었다. 저녁을 먹고 방에 돌아와 그들과 몇 마디를 나누면서 나는 그들이 대학생이며 개강 직전까지 자전거로 여행을 떠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런 패기가 부러웠다. 앞만 보고 나아가는 그 나이쯤 때에만 할 수 있는 목표의식. 물론 나도 많은 나이는 아니었지만 그때의 열정은 따라갈 수 없었고 나의 20대 때는 이미 먼지처럼 뿌옇게 흐려진 희미한 기억일 뿐이었다.

공통된 관심사에 대한 이야깃거리나 취업 후 진로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대화의 주제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덕에 밤이 깊어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를 나눴다. 같이 이야기 하는 대학생들도 오랜만에 이야기하는 나의 말에 집중을 해주었고 나도 그들이 하는 학교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면서 함께 웃어주었다. 어느덧 시간이 꽤 오래되었는지 한명이 하품을 하자 다른 한명에게 까지 전염이 되어 이만 대화의 막을 내리고 잠을 청하려고 할 때 이불 속에 들어가려던 나를 불러세웠다.

 

, ! 이거 드세요.”

?”

요 앞 편의점에서 사왔는데 진짜 맛있더라구요. 저 원래 이런 거 싫어하는데 이건 맛있네요.”

...고마워.”

그럼 주무세요!”

 

대학생 한 명은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고 쾌활하게 돌아서서 다시 제 잠자리로 돌아갔다. 부스럭 소리를 내는 손 위에 있는 작은 봉지를 보고 나는 그만 울음을 터트려버렸다. 여행 초부터 아니 그 날부터 지금까지 눌러 담아왔던 감정들이 눈물로 연결되어 쏟아져 나왔다. 침대 위에 앉은 채로 나는 작은 봉지를 들고 행여 소리가 새어나올까 봐 손으로 입을 막으며 감정을 게워냈다. 내 손 위에서 구겨지는 작은 젤리 봉지.

 

네가 좋아하는 젤리!! 진짜 구하기 힘들었어. 그래도 좋아하는 네 모습 보니깐 사오길 잘했다.’

 

철없게 웃는 네 표정이 눈앞에 완연하게 펼쳐지자 막아놨던 너에 대한 감정의 둑이 터져버려 너에 대한 기억들과 너라는 사람이 다시 나의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다정한 손길이 따뜻했던 입맞춤이 사랑을 키워나갔단 관계가 갑자기 파도처럼 나에게 밀려와 너란 바닷물에 휩쓸려버렸다. 이젠 너에 대해 무감각해졌다 생각한 나를 비웃기라도 한 것 같이 너는 다시 나를 네 손아귀에 넣었다. 지독하기도 하고 잔인하기도 한 너는 이렇게 나를 너에게 돌아가게 만들었다. 아니 지독하고 잔인한 것은 나일까. 아직까지도 너라는 것을 알았으면서도 모르는 척 덮어만 뒀던 나였을지도 모른다.

작은 젤리 봉지 하나에 무너져버린 나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밤에 몰래 게스트하우스를 나와 다시 집으로 향하는 나는 너에 대한 생각을 이제 지울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한참을 거리에서 울었다.

 



다시 내 마음 속에 자리 잡은 네가 너무 보고 싶어 그리운 날들엔 그냥 너를 생각하면서 보내기로 했다. 기억을 하지 않으려 해도 기억하려 애쓰지 않아도 너는 나에게 각인되어 있어 숨 쉬듯이 내 안에서 나타났다. 엔노시타 치카라. 너는 그렇게 다시 나의 주인이 되었다.

남은 나의 휴가 기간을 너와 함께 하기로 했다. 너와 했던 이야기를 회상하고 너와 다녔던 거리를 다니고 너와 추억이 묻어있는 내 집에서 너를 그려보았다. 그리고 그 어느 날 비밀일기를 쓰자며 나에게 졸라서 어쩔 수 없이 쓰게 된 일기장을 발견했다. 한 달 정도는 열심히 쓴 것 같았지만 갑자기 일이 바빠져서 흐지부지 되어버린 너와 나의 마지막 같은 일기장이 반가웠다. 사진 말고도 너와 나의 관계가 무엇인가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기뻐서 나는 소파에 앉아 너와 함께 한 일기장을 읽어 내려갔다.

 

327.

E. 켄지가 많이 아팠다. 감기에 걸린 것 같았지만 아니라고 우기는 탓에 이도저도 해줄 수 없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켄지는 한 번 아니면 아닌 성격이라 더는 권하지 않았다. 켄지. 아프면 아프다고 말해도 돼.

328.

H. 아픈 게 아니면 아닌 거다. 그보다 네 걱정이나 하세요. 상사가 다시 찍어오라고 했다며.

329.

E. 열이 떨어진 것 같아서 다행이야. 영상은 다시 찍어서 제출했어. 그나저나 켄지 우리 이번 주말에 놀러 갈래?

41.

H. 일요일이면 가능 할 것 같다. 그나저나 이거 상당히 귀찮네.

42.

E. 귀찮다니 사랑의 대화를 여기 적는 거야. 나중에 보면 다 추억이야. 어서 일요일이 오길 기다려야겠어!

47.

H. 귀찮지만 쓴다. 오늘 고마웠어. 일부러 데이트 코스 내가 편한 곳으로 잡아 준거 다 알아. 뭐 그런 네 모습이 좋아서 사귀는 거니깐. 고마워, 치카라.

48.

E. 너랑 섹스 한 뒤 자는 네 모습을 보면 그렇게 사랑스러울 수가 없다. 자는 네 모습은 마치 천사같다. 사랑해.

414.

H. 오랜만에 써서 미안. 그렇지만 뭐 매일 메시지도 주고받고 전화도 하고 만나기도 하는데 굳이 이걸 써야하나?

415.

E. 사랑의 기록이랬잖아. 조금만 더 분발해주세요. 후타쿠치 켄지씨.

 

일기장은 여기서 끝났다. 일기로 기록해 놓은 그때의 기억들이 마치 영화처럼 생생하게 펼쳐져서 너와 나의 추억이 살아있음을 여실히 느꼈다. 너는 이것마저 알았나보다. 짧지만 너의 필체를 눈으로 보는 것은 생각보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어느덧 눈물이 차올랐다. 흐려지는 시야에 일기장을 덮고 제자리에 꽂아 넣으려는 순간 일기장에서 사진 한 장이 떨어졌다.

너와 내가 버드나무 아래서 환하게 웃은 사진. 아마 네가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나와 함께 찍은 사진일 것이다. 그리고 사진이 떨어진 일기장 자리에는 글이 써져있었다.

 

430.

E. 안녕, 켄지. 요새 점점 더 말라가는 것 같아. 맛있는 거 많이 챙겨 먹었으면 좋겠어.

51.

E. 봄이 끝나가고 있어. 너랑 꽃구경을 더 했어야 했다고 생각해. 저번에 벚나무 아래서 사진 찍은 게 꽤 잘나왔거든.

515.

E. 오늘 화내서 미안해. 상사한테 받은 스트레스를 무의식중에 너에게 풀어버린 것 같아. 마음대로 화내버리고 나와서 미안해. 혼자 있을 네가 너무 걱정된다. 켄지. 미안해.

524.

E. 오랜만에 오프를 받은 너를 보려고 집으로 갔더니 이미 자고 있더라. 괜히 깨우기 싫어서 얼굴만 바라보다 왔는데 눈치 챘니? 자는 모습도 예뻐.

63.

E. 이번 여행은 즐거웠어. 특히 버드나무 아래서 찍은 사진은 저번 벚나무 밑에서 찍은 것보다 잘나온 것 같아. 아무래도 켄지는 나무랑 잘 어울리는 느낌이야.

610.

E. 보고 싶다. 켄지.

617.

E. 사랑해.

620.

E. 보고 싶다. 지금 만나러 갈게. 조금만 기다려줘.

 

일기장에서 느껴지는 나에 대한 너의 사랑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내게 다가와 나의 모든 것을 내리 눌렀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순간까지 너는 나를 사랑했고 이런 나를 위해 기록의 형태를 빌려서 표현을 했다. 보고 싶다고 작게 적은 너의 반듯한 필체가 너무 아름다워서 손가락으로 쓸어보았다. 펜으로 꾹꾹 눌러 써가면서 너는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했을까. 감당할 수 없는 벅찬 사랑이 나를 휘감았다.

620. 나는 너를 만나면서 어떤 표정을 지었을 까. 마지막이 되어버린 그 시간에 너는 나를 보고 싶어 했지만 나는 어떤 표정과 말들로 너를 맞이했는지 전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너는 이렇게 나를 원하고 사랑했는데 내 감정은 어떠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기록의 부재에 통째로 떨어져 나가버린 시간에 네 말을 듣지 않았던 과거의 나에게 쓸데없는 원망을 해본다.

621. 네가 죽은 날. 집에서 조용히 숨을 거둔 너는 당장이라도 일어나 내 이름을 부를 것만 같이 평온히 잠든 모습이었다. 네가 좋아하던 꽃들과 함께 너를 묻었을 때, 나는 나의 마음도 같이 묻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너는 생전에도 죽어서까지도 나를 생각했고 나를 사랑했다. 그리고 그런 너에게 보답이라도 하듯이 나는 너를 잊은 줄만 알았는데 잊은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나는 다시 너의 사랑이란 넓은 처마 안으로 몸을 피했다.

이제는 너의 흔적이 되어버린 일기장을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검정색 볼펜을 들고 이제는 네가 쓰지 못할 일기를 나 혼자 쓰기로 했다. 네가 나에게 그랬던 것처럼 나도 너와의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기로 했다.

 

829.

H. 보고 싶다.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사랑해. 엔노시타 치카라. 치카라. 치카라. 사랑해.

 

 

 

 

 

 

2015.12.06.

for yilii

pinn_pond

''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에야쿠] 33  (0) 2015.12.22
[마츠켄] 32  (0) 2015.12.14
[리에야쿠] 30  (0) 2015.12.03
[마츠쿠니] 29  (0) 2015.11.24
[쿠로츠키] 28  (0) 2015.11.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