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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켄] 18

18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내가 너와 처음 만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싹틀 무렵.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어머니들끼리 서로 친해져 너라는 사람을 소개받았을 때, 나는 한 살 형이라는 말에 이끌려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잡지 않는 너를 보고 멋쩍은 느낌이 들어 손을 빼려했을 때, 약간 떨리고 있지만 말랑하고 따듯한 손으로 너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쿠로오 테츠로야. 테츠라고 불러도 돼!” “쿠..로?” “편한 데로 불러” 앞니가 빠진 채 개구지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너는 얼굴을 들어 봄의 햇살처럼 따듯하게 웃어주었다. 그때부터 난 무엇이든지 너와 함께하려고 했다. 우연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배구부 교실에 들어가 배구에 대한 매력을 알게 되고, 나는 내가 느낀 그 감정을 너도 함께 공유하..

2015.10.16

[리에야쿠] 17

17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봄이라고 날씨가 모두 따듯한 것은 아니었다. 얇은 외투는 필수적으로 걸쳐야 할 정도의 꽃샘추위가 아직까지도 기승을 부렸다. 목이 턱 부근까지 올라오는 져지의 지퍼를 올리면서 하이바 리에프는 운동화를 다시 고쳐 신었다. 탁탁. 운동화 코를 현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혼자 사는 자취방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듣지 않을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문손잡이를 돌려 그대로 뛰어 나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걸음을 더 재촉했다. 운동 특기로 대학교에 진학한 리에프는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러시아에 가는 바람에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아이 같은 리에프가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끝까지 걱정만하시다가 가셨고, 이틀에 한번 꼴로는 꼭 국제전화를 통해 잔소리를 하..

2015.10.16

[엔노후타] 16

16엔노시타 치카라/후타쿠치 켄지 후타쿠치 켄지는 스트레이트였다. 그는 스물여덟 해를 살아오면서 본인의 성적 취향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의심을 하지 않았다. 다른 직업 세계보다 성적 취향에 대해 관대한 방송계 쪽 직업을 가지고 있었고, 그의 주변에도 몇몇은 게이였고 레즈였고 바이였다. 그러나 후타쿠치는 그들에게는 일반적인 성적 취향을 가진 사람과는 다른 묘한 거리감을 두었다. 웃는 낯으로 돌직구를 날리는 사람. 후타쿠치를 아는 사람들이 그를 평가할 때 하는 말이다. 이런 말을 들은 후타쿠치도 딱히 반박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자신은 그런 사람이었기에. 사람을 대하는 것에 있어서 어려운 것은 없었다. 깔끔하고 호감 가는 외모, 화려한 언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인생을 살기에 편리한 여러 조건을 갖추고 있..

2015.10.16

[카게스가] 15

15카게야마 토비오/스가와라 코우시 초여름에 비가 왔다. 갑자기 하늘이 우중충해지더니 투두둑 제법 거센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일기예보를 듣고 소나기가 내린다는 것을 안 학생들은 하나둘 우산을 펴고 하교를 해서 교내에 남아있는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몇 남지 않는 학생 중 하나였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남자 또한 그런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창문과 자신 앞에 있는 남자 사이에 껴있는 형태가 되어버린 스가와라는 어색한 침묵에 실내화를 신은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실내화 앞 코가 약간 지저분했다. 빗방울 소리가 잦아들고 비 냄새가 창문을 타고 들어 왔을 때, 앞에 있던 남자가 스가와라의 손을 잡으면서 이야기 했다. “왜 대답을 안 들려주시는 거예요?” 맡겨놓은 것이라도 있는지 당당하게 대..

2015.10.16

[쿠로아카] 14

14쿠로오 테츠로/아카아시 케이지 나는 언제나 그를 바라보고 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지만, 나에게는 그를 눈에 담는 모든 순간이 세상에 어떠한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중요했다. 최근에 들어서는 그 생각이 더욱 많이 들었다. 그는 3학년으로 짧으면 짧고 길면 길 정도의 마지막 고교 생활이 남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바라보는 시간이 소중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에게 말을 걸고 나 또한 그에게 아무렇지 않게 대답을 한다. 하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나를 생각하겠지만 나는 그를 아무렇지 않게 생각할 수 없었다. 이런 생각을 혼자 할 때면 속상할 법도 하겠지만, 나는 그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기에 더 이상 상처받을 것도, 실망 할 일도 없었다. 약간의 체념. 그것은 내가 아주 잘하는 일이다..

2015.10.16

[리에야쿠] 13

13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3학년의 하이바 리에프에게 최근에 큰 관심사가 생겼다. 물론 인터하이 예선전까지 얼마남지 않아 모두들 열심히 연습에만 집중했지만, 네코마의 3학년 에이스에게는 그것보다 더 중요할지 모르는 사안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최근 눈에 담는 사람이 생겼는데 그 대상은 새로 배구부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1학년이었다. 그 1학년은 뛰어난 리베로로, 원래 주전으로 뛰고있던 2학년 리베로를 제치고 바로 주전으로 발탁되었다. 리에프도 처음에는 그냥 리시브를 잘하는 1학년 리베로로 생각했지만 어느 샌가 1학년 리베로의 뒷꽁무늬만 졸졸 쫓아다니는 자신을 볼 수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호기심이었다. 배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신장을 지니고 있었지만 그의 눈빛은 예의 에이스를 뛰어넘는 진지하고도 ..

2015.10.16

[야쿠생일] 12

12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알겠지?” “네! 부장!” 네코마 고교 배구부 부원들이 연습 도중 체육관 한편에 다들 모여 무엇인가를 의논하고 있었다. 비밀 이야기라도 하는지 분위기는 엄숙했고 1학년인 이누오카와 시바야마는 긴장이라도 한 것같이 입을 꾹 다물고 네 네 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의외로 다른 일에 관심이 없는 켄마조차 굳은 결심을 한 표정을 하고 쿠로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 해산!” 쿠로오는 박수를 몇 번 치더니 부원들에게 해산을 통보했고, 다들 발걸음을 옮기면서 무엇인가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켄마는 다른 사람과 가지 않고 쿠로오 옆에 남아 있다가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표정으로 급하게 쿠로오의 옷깃을 당겼다. 쿠로! 쿠로! 켄마의 다급한 외침에 쿠로오는 상체를 숙여 그가 속삭이는..

2015.10.16

[리에야쿠] 11-2

11-2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 SIDE L “아, 죄송합니다.” 처음에는 어디선가 나는 달콤한 향기에 이끌렸다. 따사로운 햇살이 땅에 모든 것을 감싸주는 느낌이 드는 포근하고 매혹적인 향기에 이끌려 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그 향기를 쫓고 있었다. 향기에 이끌려 체육관 주변을 걷고 있을 때, 멀리서부터 뛰어오는 모랫빛 머리칼의 사람에게서 나는 향이라 확신할 수 있었다. 그 향기를 더 맡고 싶었다. 나의 모든 신경이 그 향기를 놓치면 안 된다고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한 손에는 콘 아이스크림을 들고 다른 손에는 핸드폰으로 무엇인가를 하면서 앞을 보지 않고 달려오고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 사람과 부딪혀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은 내 일생 중 가장 잘한 일이라 생각했다. 일부러 달려오는 그 사람 앞..

2015.10.16

[리에야쿠] 11-1

11-1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 SIDE Y “아, 죄송합니다.” 한가롭게 매점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다가 쿠로오의 긴급 소집 라인을 받고 체육관으로 뛰어가던 중이었다. 급한 마음에 핸드폰으로 곧 간다는 라인을 입력하면서 뛰어가고 있었는데, 앞에 있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부딪쳐 버렸다. 콘 위에 있던 아이스크림이 부딪친 사람의 옷에 묻어버렸다. 귀찮게 되었다. “괜찮아요.”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분명 체육관 근처라서 대부분 알음알음 하는 사이인데도 부딪친 사람의 목소리는 낯설었다. 누굴까. 궁금한 마음에 얼굴을 들어 부딪친 사람을 바라보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키가 컸다. 190이 넘으려나. “헉, 많이 묻었네요. 세탁비 드릴게요. 정말 죄송합니다.” 그 사람의 교복 재킷은 이미 아이스크림으로 ..

2015.10.16

[쿠로켄] 10

10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켄마, 괜찮아?” 으응. 하고 조그만 대답이 들렸다. 쿠로오는 자신의 연인이 걱정되었다. 켄마가 저번부터 계속 기침을 하더니 결국엔 독감이 크게 들어버린 탓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켄마의 집에 부모님이 계시지 않는 탓에 전적으로 간호를 쿠로오가 맡고 있었다. 처음에는 간병이벤트를 외치면서 기대했던 쿠로오는 유독 심하게 들은 독감 때문에 고생하는 켄마를 보고 이제는 간병이벤트를 잊은 채 걱정뿐이었다. 쿠로오는 식은땀을 흘리면서 침대에 누어있는 켄마에게로 걸어가 입을 맞췄다. 코가 막힌 것인지 입으로 숨을 쉬어 켄마의 입술은 까슬까슬 해져 있었다. 곧 쿠로오가 손을 들어 켄마의 이마에 있던 물수건을 치우고 뺨에 손을 댔다. 아직도 갓 찐 호빵처럼 따끈따끈했다. “열이 쉽게 안..

2015.1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