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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흑] -13

-13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쿠로코는 거리를 걷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흐드러지게 핀 개나리는 어느덧 봄이 왔음을 알려주었다. 그래도 약간의 추위는 남아있어서 몸이 움츠러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집집마다 다른 나무와 꽃들이 피어있는 것을 눈에 담으면서 쿠로코는 카가미의 집으로 가고 있었다.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먹을 것을 좋아하는 카가미는 요리하는 것도 즐겨해 가끔씩 사람들을 초대해서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곤 했다. 카가미가 가장 신뢰하는 친구인 쿠로코 역시 자주 초대 받는 사람 중 하나였다. 쿠로코는 소식가에 가까운 편이었지만 카가미의 요리는 쿠로코의 입맛에도 잘 맞아 그가 초대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꼭 갔다.오늘도 그 날 중 하나였다. 일주일 전부터 꼭 시간을 비워 놓..

2016.01.08

[창작] -12

-12창작 한 나라가 있었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평범한 나라였다. 하루하루 성실히 벌어먹고 살며 아이들이 천진하게 뛰어노는 일상 같은 나라였다. 백성들은 수수한 옷차림만큼 눈에 띄지 않는 소시민적인 삶을 좋아했다. 그들은 기후를 닮아 온화하고 잔잔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낮에는 각자의 일에 집중하다가 밤에 가족들이 모여 한상에 갓 찐 감자를 나눠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부모답게 그 나라의 왕 또한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내지 않고 다른 나라와 필요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무역과 자체적 생산으로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나라를 그는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의 암투나 전쟁과 기근이 없었..

2016.01.06

[쿠로켄] -11

-11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연애 해볼래?”“무슨 소리야.”어째 오늘 플레이스테이션을 순순히 같이 해줄 때부터 이상했다. 가끔 쿠로오는 엉뚱한 말을 많이 했으나 이런 류의 말은 그 누구에게도 하지 않았다. 질 낮아 보이는 장난에 켄마는 인상을 쓰면서 들고 있던 게임패드를 내려놓았다. Game over. 형형색색의 게임 배경이 온통 비춰졌던 모니터에 오로지 검은색 화면에 빨간 문구만이 떠다녔다. 쿠로오 역시 게임패드를 내려놓더니 옆에 있던 쿠키를 집어 들고는 한 입 베어 물었다. 와삭거리는 소리와 쿠로오가 쿠키 씹는 소리만 조용한 켄마 방에 떠다녔다.켄마가 알리 만무한 말을 던져놓고 본인은 아무렇지 않은 듯이 아까 흘렀던 게임 배경음을 흥얼거리면서 딴 짓을 했다. 정말 그냥 장난이었던 걸까. 켄마는 ..

2016.01.05

[마츠하나] -10

-10마츠카와 잇세이/하나마키 타카히로 “슈크림 어디가 좋아?”“음…”아기자기한 카페에 덩치 큰 두 남자가 있는 모습은 약간 기묘했지만 당사자들은 익숙하다는 듯이 주변 시선에 신경 쓰지 않고 서로의 대화에 집중했다. 이 주변에서 가장 맛있다고 소문난 슈크림을 한 입 베어 물면서 하나마키는 마츠가와가 질문한 것을 곰곰이 생각했다. 내가 슈크림을 좋아하는 이유라. 딱히 생각해본 적은 없었으나 어느새 부턴가 슈크림을 입에 달고 살았다.“그러게”“알지도 못하면서 좋아한 거야?”“그럼 맛층은 왜 치즈 햄버거 좋아하는 거야?”“일단은 고기니깐 그리고 맛있잖아. 또 치즈가 들어가면 적당히 짠맛이 나니 좋아.”쉽게 대답하는 마츠카와를 보니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살고 있는가 하는 마음이 들어 하나마키는 입에서 우물거리..

2016.01.05

[리에야쿠] -9

-9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야쿠상!!! 데리러 왔어요!!!”평범한 아침이었다. 모처럼 받은 휴강으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초가을이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 덕에 야쿠는 얇은 코트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뒤 현관문을 닫고 있었다. 핸드폰에 이어폰을 꼽고 평소 좋아하던 플레이리스트를 터치하려던 순간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덕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조용한 주택가라서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무례한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져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뒤에 있는 남자는 키가 매우 컸다. 저렇게 키가 큰 사람은 처음 본 터라 야쿠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은발의 남자는 이국적인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모..

2016.01.05

[다이스가] -8

-8사와무라 다이치/스가와라 코시 “다이치, 이거 받아.”한창 연습이 막바지에 닿았을 때, 다이치의 얼굴에 무엇인가 차가운 게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스가가 겉 표면에 물방울이 맺힌 스포츠 음료를 내밀고 있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 무엇이 필요한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말을 하지 않아도 이 회색머리 남자는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이 다이치에게 필요한 것들을 콕콕 집어냈다. 불과 그와 만난 지는 3년도 채 안되었다. 세간에서 말하는 소꿉친구처럼 스가는 다이치에게 그 이상의 존재가 되었다. “아 고마워.”자신에게 건네주는 노란색 스포츠 음료수 통을 받으려 손을 그 위에 올려놓았다. 스가의 하얀 손가락이 전체적으로 음료수 통을 감싸고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손가락이 닿고 말았다. 흠칫. 긴장하는..

2016.01.05

[쿠로켄] -7

-7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눈이 시렸다. 무엇인가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있었는데 더 이상 꿀 수 없었다. 눈꺼풀이 파르르하고 몇 번 흔들리더니 이내 황금색 눈동자가 천천히 모습을 보였다. 초점이 맞지 않아 뿌옇게 흐렸던 시야가 서서히 제 위치를 잡아가며 선명히 비춰졌다. 몇 시일까. 아직까지 몽롱한 상태인 켄마는 천장을 바라보다가 제 옆에 있는 남자에게 시선을 옮겼다. 검은 머리칼과 목덜미를 따라 아슬아슬하게 펼쳐진 반라의 모습이 켄마에겐 낯설지 않았다. 숨이 막히지 않는 지 오늘도 쿠로오는 베개를 양 옆으로 잡아 머리를 누르며 자고 있었다. 켄마는 꼼짝하기 싫었으나 창을 뚫고 들어오는 강렬한 햇살과 조금 열린 테라스 문 틈 사이로 들려오는 바람에 나뭇잎끼리 부딪히는 소리에 조금씩 몸을 움직였다. 짹..

2016.01.04

[마츠카와] -6

-6마츠카와 잇세이 마츠카와는 그를 사랑했다. 맹목적인 사랑을 느끼기는 처음이어서 기시감을 느꼈지만 이것이 참된 사랑임을 깨달은 마츠카와는 그 어느 때보다 그 사랑에 깊이 빠졌다. 때로는 숨이 답답할 정도로 그를 원했다. 그러나 잡을 수 없는 곳에 놓인 그는 마치 마츠카와를 비웃기라도 한 것 같이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손을 뻗어도 닿지 않았고 큰 소리로 외쳐 봐도 들리지 않았다. 지칠 법한 상황에서도 마츠카와는 사랑이라는 버팀목을 만나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잃지 않을 수 있었다.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볼 때면 그는 새침한 얼굴을 하면서 마츠카와의 애를 태웠다. 유혹하는 느낌이 들면서도 밀어내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왜 이런 사람을 사랑한 것인가 하는 의문 따윈 애초에 가지지 않았다.마츠카와가 사랑하..

2016.01.03

[오이이와] -5

-5오이카와 토오루/이와이즈미 하지메 최근 오이카와의 상태가 달라진 것 같아서 이와이즈미는 신경이 쓰였다. 예전 같았다면 알아채지 못하고 넘겼을 일이었는데, 이번엔 무엇인가 전과는 다른 느낌이었다. 그래, 그때 같았다. 이와이즈미는 그 생각에 미치자 인상을 찌푸렸다. 오이카와에게 처음으로 암흑이 드리우던 날. 지금 오이카와는 그 상태와 매우 흡사해 보였다. 이와이즈미는 다시금 변해버린 제 소꿉친구를 걱정하기 시작했다.미치도록 사랑한 배구가 제 능력 범위 밖의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달은 오이카와는 엇나갔다. 그리고 한계에 다다랐을 무렵 그는 일생일대의 실수를 저지를 뻔 했다. 그가 사랑한 배구코트 위에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할 뻔했다. 이와이즈미는 자신이 그 자리를 지나가고 있었다는 것을 다행히 여겼..

2016.01.02

[보쿠아카] -4

-4보쿠토 코타로/아카아시 케이지 “아카아시, 이리로!”운동화와 왁스칠한 바닥이 마찰해 삐걱대는 소리와 청춘들의 땀 냄새로 가득한 후쿠로다니 학원의 체육관은 배구연습이 한창이었다. 한 쪽에서는 리시브를 연습하는 무리들이 있었고 코트 앞에는 토스와 스파이크를 연습하는 무리가 있었다.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던 회색 머리의 남자는 곧 제 차례가 오자 네트 앞에 서있는 검은 머리의 남자에게 손을 들어 올리며 콜을 했다. 검은 머리의 남자는 콜을 듣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회색 머리의 남자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공을 하늘 높이 띄웠다.—쾅. 체육관 바닥을 매섭게 강타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려 퍼졌다. 그가 때리기 쉽도록 가장 좋아하는 코스를 보낸 검은 머리의 남자는 겉으로는 표시가 나지 않았으나 경쾌한 스파이크 소..

2016.01.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