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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로오 테츠로/사와무라 다이치
‘더 좋아하는 사람이 지는 거야.’
쿠로오는 신발 끈을 고쳐 묶으며 다시 그의 친구가 해준 말을 상기했다. 자신보다 연애경험이 적은-아예 없는- 켄마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은 쿠로오에 있어서도 수치였다. 그러나 반박 불가였다. 자신이 딱 그런 상태였기 때문이다.
연습하는 시간 빼고는 모든 생각이 그였다. 사실 연습할 때도 가끔씩 배구공이 그의 얼굴로 보여서 스파이크를 치려 힘껏 점프를 해도 손으로 치지 못하는 경우가 있었다. 내가 어떻게 다이치의 얼굴을 때려! 라는 것이 쿠로오의 마음이었지만, 그런 바보 같은 모습을 보고 켄마는 고개를 저었다.
결국 열에 한번 아니 스무 번에 한 번 나올까 말까하는 리에프의 강스파이크에 뒤통수를 얻어맞고는 자신이 배구에 전혀 집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쿠로오는 인정했다. 더 이상 연습에 집중 할 수 없기에 쿠로오는 샤워장에서 몸을 씻고 마지막으로 공을 정리하는 켄마를 기다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핸드폰에서 손을 놓지 않았다.
‘뭐해? 연습 끝났어?’
송신 버튼을 누르고 그의 답장을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 길었다. 아- 연장시합도 이렇게 길지는 않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너무 꽉 쥐고 있어서 손난로처럼 뜨끈뜨끈해진 핸드폰을 빤히 바라봤다. 그리고 얼마 안가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아직’
짧은 단어였지만 웃음이 얼굴에 번졌다. 그 예쁜 손으로 자신에게 보낼 문자를 입력할 모습을 상상하니 아까 맞았던 뒤통수의 아픔도 사라지는 느낌이었다. 한참 웃으면서 뭐라 답장해야할지 고민하고 있을 때 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로...지금 엄청 못생겼어”
“헤헤…뭐?!”
“얼굴이 막 푸딩처럼 흐물흐물 해.”
켄마는 그렇게 말하고 닌텐도를 꺼내들어 게임을 하며 먼저 걸어갔다. 예상치 못한 켄마의 말에 본의 아니게 타격 입은 쿠로오는 게임을 하며 걸어가는 켄마의 작은 뒷모습을 멀거니 지켜봤다. 그리고는 ‘니 머리가 더 푸딩이야!!’를 외치면서 켄마에게 뛰어갔다.
“네? 카라스노와 다시 합숙이요?”
감독이 따로 할 이야기가 있다며 체육관 구석으로 데려가 이야기를 했을 때, 쿠로오는 감독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지 않았다. 아직 카라스노와 합숙한지 두 달이 갓 넘어가는데 이렇게나 빨리, 그리고 같은 학교와 또 같이 합숙을 하는 것은 그가 배구를 시작하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래. 이번에는 우리 체육관에서 할 예정이니깐 따로 준비할 것은 없고 애들한테 일러둬. 자세한건 코치한테 말해 놓을 테니깐.”
“네, 감사합니다!”
감독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코트 위로 올라왔을 때, 쿠로오는 다시 자신의 입에 웃음이 걸려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라스노와 합숙이라니! 사와무라를 보게 된다!’
갑자기 어디서 호랑이 기운이라도 솟은 듯이 쿠로오는 연습에 열중했다. 하지만 평소 무표정이나 비웃는 듯한 웃음을 달고 다니던 쿠로오가 만면에 미소를 짓고 다니자 네코마 배구 부원들은 술렁였다. 부장이 미쳤다고.
켄마는 한숨을 쉬었다. 이틀 전에 카라스노의 부장에게서 메시지 답장을 받은 쿠로오의 상태가 저것과 똑같았다. 켄마는 이것도 카라스노의 부장과 관련되어 있음을 눈치 채고, 오늘은 신칸센을 혼자 타고가기로 마음먹었다. 왜냐하면 쿠로오는 기분이 좋지만 티를 내지 못할 때는 켄마를 괴롭히는 것으로 대신하기 때문이었다.
“...바보”
그렇게 작게 말하고는 다시 토스를 올렸다.
카라스노와 합숙이 시작되고 모두들 연습에 집중하고 있을 때 딱 한 사람만 집중하지 못했다. 당연하게도 네코마의 부장 쿠로오였다. 다른 코트에서 연습하고 있는 다이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리에프에게 리시브를 가르쳐주고 있다가, 결국 그 모습을 참지 못하고 화가 난 다이치에게 한소리를 들었다.
“쿠로오 부장님, 연습에 집중 좀 부탁드립니다.”
다이치는 웃으면서 이야기 했지만, 그의 얼굴에는 약간의 노기가 서려있었다. 그것을 눈치 챈 쿠로오는 다이치 쪽으로 멋쩍게 고개를 숙이고는 다시 리에프에게 리시브를 가르쳤다. 왠지 모르게 아까보다 더 엄하게 말이다.
다른 사람보다 유독 리에프만 힘들었던 연습이 끝나고 남은 1,2학년들이 체육관을 정리하고 있을 때, 쿠로오는 체육관을 빠져나가는 다이치의 뒷모습을 따라 나갔다. 다이치는 한참 걷다가 벤치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는지 다이치의 얼굴에는 흔히 볼 수 있는 가식적인 웃음이 아닌 정말 환한 웃음이 피었다. 아주 즐겁게 통화를 마친 다이치는 다시 체육관 쪽으로 걸어오다가 멀리서 지켜보는 쿠로오를 발견했다.
“누구야”
입이 삐죽 나와서는 볼멘소리로 쿠로오가 말했다. 그러더니 다이치의 손을 덥석 잡고는 본인 쪽으로 끌어 당겨 안았다. 땀 냄새가 훅하고 풍겼다. 다이치는 당황해서 밀쳐내려 했지만, 쿠로오가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만족한다는 듯이 쿡쿡대는 바람에 결국은 쿠로오의 등을 팔로 감싸 안아줬다.
“누구긴 엄마지. 바보냐?”
“바보라... 켄마도 나한테 그런 말을 했지. 다이치의 문자를 보고 있는데 나한테 그랬다니깐?”
“역시 네코마의 세터야. 눈치도 빠르지. 잘 알고 있네!”
자신을 바보라 놀린 것을 혼내달라고 쿠로오가 일렀지만 그의 응석을 받아줄 다이치가 아니었다. 단칼에 잘라버리는 말에 쿠로오는 약간 투덜거렸지만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고 다이치의 어깨에 얼굴을 비볐다.
“좋다. 사와무라랑 이렇게 있으니깐”
“저 저번주에도 만나고 매일 문자도하고 전화도 하는데 뭘 새삼스럽게 그래.”
사와무라는 너무 체육계야, 낭만이 없어 낭만이!!라고 투덜거리면서도 쿠로오는 다이치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이 남자의 무뚝뚝한 면까지도 모든 게 사랑스러웠다. 단지 조금만 애정표현을 해줬으면 하는 아주 작은 소망이 쿠로오에겐 있었다.
“아마...인터하이보다 어렵겠지..”
“응? 뭐가 어려워?”
“아냐~ 그러고 보니 감독님이 온천 예약해놨다고 했어. 지금쯤이면 갈 시간일 텐데”
온천이라는 한마디에 다이치는 어서 가자며 쿠로오의 손을 잡았다. 그것에 또 기분이 좋은 쿠로오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다이치를 따라갔다. 아, 내 표정 지금 엄청 못생겼겠지 라는 쓰잘데기없는 생각을 하면서.
둘은 온천에 늦게 도착한 편이었다. 다른 부원들은 이미 온천에서 한바탕 즐기고 나와, 몸에서 열기를 뿜으며 다 하나씩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고 프로 배구경기를 시청하고 있었다. 쿠로오는 둘만 온천을 쓰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날아오를 것 같았지만, 아직 감독과 카라스노의 타케다 선생이 남아있다는 소식을 듣고 좌절했다.
다이치는 전화가 와서 받으러 잠시 밖으로 나간 사이에 쿠로오는 흥얼거리면서 탈의실에서 옷을 벗고 있었다. 언더웨어가 땀에 젖어있어서 벗기가 조금 사나웠지만 기쁜 마음으로 벗어 빨래 통에 넣고 하체에 수건을 두르고 온천으로 들어가려 했다.
“오늘 합숙도 감사했습니다!”
명랑한 소리가 문 틈 사이로 흘러나와 쿠로오의 귀에 들렸다. 그리고는 곧 걸걸한 소리가 들렸다.
“우리 쪽도 감사했네, 카라스노 애들이 많이 성장한거 같아서 기쁘구먼, 하하”
“아직 네코마에 비해 리시브도 부족하다고 코치에게 들었지만, 아이들이 노력하는 만큼 곧 쓰레기장 결전도 이루어질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꼭 보고 싶습니다.”
확신에 가득 찬 타케다 선생의 목소리가 온천에 울려 퍼졌다. 감독은 기쁘다는 듯이 껄껄 웃었고 타케다 선생도 무슨 질문이 많은지 감독에게 이것저것 물어봤다.
‘흠...지금 들어가는 건 방해되는 느낌인데..’
쿠로오는 그렇게 생각하고 뒤돌아 나가려던 찰나 타케다 선생의 목소리가 그의 발목을 잡았다.
“이번에는 다른 학교와 합숙을 잡아보려 했는데, 아 아오바죠사이 고등학교 아시죠? 원래는 거기와 하려했어요. 그런데 저희 주장이 강력하게 네코마를 미는 바람에...”
“오... 주장이라면 그 사와무라군 말하는 건가?”
“네- 이번에 저랑 코치랑 사와무라군 셋이서 합숙 학교를 상의했는데, 아직 네코마에게 배울 것이 많다면서 꼭 네코마로 하자고 너무 강력하게 말하는 바람에 저랑 코치랑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니까요?”
그렇게 말하고는 서로 크게 웃었다. 그리고 온천 문 밖에서 네코마의 부장도 소리는 안내고 있었지만 아주 그리고 행복하게 웃고 있었다. 손에 들고 있었던 수건을 다시 제자리에 두고 다시 옷을 입었다. 탈의실을 나와 복도를 거닐면서 쿠로오는 하늘로 날아갈 거 같은 기분을 느꼈다.
‘설마... 나를 보고 싶어서?’
그럴 일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마음 한편에서 뿜어져 나오는 행복한 의문은 그의 기분을 더 업되게 했다. 어서 다이치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다이치는 막 통화를 끝내고 온천장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핸드폰을 바지 주머니에 넣고 어서 온천장에 들어갈 생각에 앞을 본 순간 자신의 앞에 쿠로오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직 몸에서 땀 냄새가 풍기는 것을 보면 쿠로오는 씻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기다려준건가 생각하며 다이치는 말을 했다.
“쿠로오, 아직도 안 씻었어? 어서 가서 온천에 몸 담그자.”
“나 때문에 네코마랑 합숙 추진한거야?”
순간 다이치의 얼굴에 ‘이 새끼가 지금 무슨 말을 지껄이는거야’라는 험악한 표정이 지나가서 쿠로오는 약간 쫄았지만 그래도 다시 용기를 내 물어봤다.
“응? 사와무라, 말해주라~”
“아니. 너 때문이 아닌데.”
“나 때문이 아니면 뭔데?”
“네코마는 리시브를 잘하잖아. 우리 부원들은 아직도 리시브가 부족해. 서로 합숙하면 그 부분에 대해 잘 배울 꺼라 생각했어. 그리고 너희랑은 안면도 있고 그래서 추진한거야.”
쿠로오는 입을 삐죽였다. 사실이 아니더라도 너때문이야!를 듣고 싶었다. 이 무정한 남자는 그런 말 한마디도 안 해주지. 전보다 의기소침해진 쿠로오는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시 온천장으로 걸어갔다. 다이치 역시 그런 쿠로오를 보고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따라갔다.
다시 온천장에 왔을 때는 이미 감독과 타케다 선생은 없었다. 분명 전과 같았다면 둘만 있는 온천에서 쿠로오가 다이치에게 끈덕지게 달라붙었을 텐데, 쿠로오는 정면만 바라보면서 아무 말도 없었다. 그렇다고 과묵한 편인 다이치도 먼저 말을 거는 편은 아니라서 온천장에는 침묵뿐이었다.
그렇게 침묵이 어느 정도 흘렀을 때, 물소리가 참방 들리더니 다이치 쪽으로 한 발짝 옮긴 쿠로오가 먼저 물었다.
“정말 나 보고 싶어서 그런 거 아냐?”
“뭐? 너 아직도 그 생각 중이었어?”
“난 계속 사와무라 생각뿐이야”
“...넌 잘도 그런 부끄러운 소리를 한다.”
쿠로오의 부끄러운 발언 때문에 약간 쑥스러움을 느낀 다이치는 얼굴까지 온천물에 담갔다. 뜨겁지만 참을 만한 정도의 온도가 얼굴을 덥혔다. 약간 가슴께가 간질간질 한거 같기도 했다. 다이치가 쑥스러움에 발가락만 꼼지락 대고 있을 때 쿠로오의 손이 다이치의 손을 잡았다.
“그래도 좋아.”
“응?”
“사와무라가 무뚝뚝하고 표현 안 해도, 난 그런 모습의 사와무라를 좋아하는 거니깐. 약간 섭섭해도 좋아. 좋은 건 좋은 거니깐”
이 남자의 뻔뻔함은 대체 어디서 나오는 걸까. 다이치는 생각했다. 다이치 자신은 입에도 올리지 못할 부끄러운 말들은 아무렇지 않게 말하고, 그 대상이 본인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두말할 것 없이 낯이 뜨거워 졌다.
쿠로오는 다이치와 계속 손도 잡고 있었고 방금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했지만, 다이치가 보기에는 어째서인지 쿠로오의 분위기가 어두워보였다. 바보 같은 남자. 아니 자신한테만 바보인 남자. 다이치는 약간의 용기를 내기로 했다.
“…사실 보고 싶어서 그랬어. 그래서 네코마랑 연습잡자고 선생한테 말했어.”
마주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쿠로오는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다이치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해맑게 웃으며 다이치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정말? 정말이지?”
“그래. 좀 얼굴 좀 떨어져 줄래?”
“좋다. 정말 좋아!! 사와무라 진짜 진짜 좋다.”
쿠로오는 다이치에게 몸을 붙여 어깨를 기댔다. 왜 여자들이 무뚝뚝한 남자가 무심하다가 가끔씩 툭 던지는 다정함에 열광하는지 쿠로오는 깨달았다. 자신에게만 보여주는 이런 모습들 때문에 좋아한다는 마음은 날로 갈수록 커지기만 했다.
“저기, 쿠로오. 이제 손 좀 놔..”
쪽. 하는 소리가 조용한 온천탕에 울렸다. 맨들맨들한 입술들이 서로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였다. 그리고는 쿠로오가 다이치를 껴안았다.
“사와무라, 진짜 많이 좋아해.”
“...알았으니깐”
“다이치 좋아해.”
“…이름 부르는 건 반칙이야”
다이치는 쿠로오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다시 입술을 가까이 했다. 둘 만 있는 온천탕에서 오래간만의 키스가 이어질 무렵, 쿠로오는 생각했다. 더 많이 져도, 다이치가 이렇게만 해준다면 바랄게 없다고.
2015.0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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