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아카] 5-2

pinn_pond 2015. 10. 16. 02:47


5-2

쿠로오 테츠로/아카아시 케이지

 

 

 


그로부터 상당히 시간이 흘렀음에도 아카아시는 쿠로오를 찾지 않았다. 전에는 이런 아카아시의 방식 때문에 쿠로오는 홀로 가슴앓이를 했으나, 이제는 이런 상황에 휘둘리지 않았다. 익숙해졌다고 해야 옳았다. 결국엔 자신은 보쿠토의 대용일 뿐이라는 걸 쿠로오는 잘 알고 있었다.

켄마가 여름합숙에 들어가 당분간은 쿠로오 혼자 집에 있게 되었다. 그를 그나마 사람답게 살게 해주던 보호자가 없으니 쿠로오는 더욱더 무기력해졌다. 학교는 거의 안 나가다시피 했고, 침대 위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거나 핸드폰 액정만 빤히 바라보는 게 쿠로오의 일과였다. 쿠로오는 무기력했다.

투둑 툭툭. 빗방울이 창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나더니 바깥에는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졌다.

집으로

짧은 진동 뒤에 액정이 반짝였다. 반사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한 쿠로오는 발신자를 확인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생기 없던 인형에 신이라는 존재가 숨을 불어 넣었다. 쿠로오에게 아카아시는 그런 존재였다.

 



소나기가 시원하게 내렸다. 이상하리만큼 쿠로오의 마음은 벅차올랐다. 평소에는 무심하게 바라보던 길거리마저 지금은 그에게 천국으로 가는 길과 흡사했다. 떨리는 마음과 손을 애써 부여잡으며 그는 그 누구도 짓지 못할 행복한 표정을 하고 아카아시의 아파트로 걸어갔다.

복도식으로 되어있는 아파트의 한 층의 끝에는 아카아시의 집이 있었다. 오늘따라 멀게만 느껴지는 현관문이 쿠로오는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현관문 앞에서 쿠로오는 우산을 접고 자신의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그에게만은 자신의 한심한 모습을 보여줄 순 없었다.

비밀번호를 누르고 집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쿠로오는 행복했다. 벅차오르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어서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지만, 아카아시의 아파트 안으로 들어간 순간 그는 저 바닥으로 내동댕이쳐졌다. 현관에는 두 개의 신발이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설마. 하는 마음이 쿠로오의 약해진 마음을 다독였다. 아닐 수도 있다. 쿠로오는 축축한 신발을 벗고 아카아시의 방으로 한걸음을 내딛는 것이 자갈길을 맨발로 밟는 것처럼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하지마, 보쿠토

왜 여기 좋아하지 않아?”

키득거리는 연인들의 속삭임이 살짝 열려있는 방문 틈사이로 흘러나왔다. 약간은 토라진 듯 앙탈부리는 아카아시의 음성. 그런 아카아시가 귀엽다는 듯이 낮게 웃는 보쿠토의 목소리. 모든 소리가 쿠로오의 몸을 타고 그의 귀로 들어왔다.

옴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이미 쿠로오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방문 틈사이로는 두 사람의 맨다리가 얽혀있었다. 더 볼 수는 없었지만 이미 쿠로오의 머릿속에서는 모든 것이 상상되어 그를 옭아맸다. 구역질이 났다.

사랑해. 사랑해 보쿠토. 나에겐 너뿐이야. 언제나

, 아카아시 나도.”

절절한 연인들의 고백에 쿠로오의 턱이 덜덜 떨렸다. 한계였다.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그는 숨을 죽인 채 아카아시의 아파트를 빠져나왔다.

여태까지 쿠로오는 아카아시가 원할 때 원하는 대로 만나왔지만, 이렇게 보쿠토와의 연애 장면을 보여준 것은 처음이었다. 아카아시는 유독 쿠로오와 보쿠토가 만나는 것을 싫어했다. 가끔 어쩔 수 없이 볼 때 빼고는 쿠로오는 보쿠토를 만나지 못했다. 하지만 이렇게 훔쳐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국 치미는 구역질을 이기지 못해 아파트 한 귀퉁이에 토했다. 사실 먹은 게 별로 없어서 신물만 올라왔지만 쿠로오는 계속 헛구역질을 했다. 자신이 들었던, 눈에 담았던 모든 것들을 바깥으로 내보내고 싶은 쿠로오의 마음이 그를 더 재촉했다. 왜 나는 여기 있을까.




쿠로오는 집으로 들어와서는 서랍장을 마구 뒤졌다. 보이지 않는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쿠로오는 집 안 이곳저곳을 무언가를 찾아 헤맸다. 그는 지금 자신의 몸을 지워버릴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한참 아카아시에 대한 애착이 강했을 때, 쿠로오는 자기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극에 달해 있어서 자해를 일삼았다. 처음에 그 모습을 본 켄마가 기겁을 하고 화를 내며 말렸지만, 켄마가 없을 때마다 이곳저곳에 상처를 내는 쿠로오를 보고 집에 있는 모든 날카로운 것들을 치웠다.

날카로운 것이 보이지 않자 쿠로오는 답답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침대에 앉았지만 그의 불안한 정신 상태는 해결되지 않았다. 창문을 바라봤다. 아직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쿠로오는 잠깐 밖을 바라보더니 탁자에 있던 조명등을 들어 창문을 세게 내리쳤다.

들쭉날쭉한 유리조각이 투명하게 빛났다. 쿠로오는 제법 큰 조각을 손으로 들었다. 살짝만 손목에 조각을 댔지만 피가 방울방울 나왔다. 한 번 그었다. 피가 선을 타고 흐른 만큼 쿠로오의 마음도 시원해졌다. 빠져나간다. 내가 아닌 너.

다시 아카아시의 아파트가 생생하게 쿠로오의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아카아시의 침대. 그 위에 있는 자신과 그. 사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아카아시를 생각하면서 쿠로오는 행복하게 다시 한 번 그었다. 하지만 자신의 모습이 뭉개지더니 갑자기 보쿠토의 얼굴이 나왔다. 아까 자신이 훔쳐봤던 그 장면이 상상까지 더해져 잔인하게 그려졌다.

침대 위에서 정사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에 쿠로오는 유리조각을 움켜쥐었다. 아까보다도 많은 피가 그의 손에서 나왔다. 왜 나는 여기 있고, 저기에 없을까.

쿠로, 나 왔...”

예정보다 일찍 켄마가 집에 온 것은 예상치 못한 일이었지만, 그것이 쿠로오에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었다. 켄마, 또 울겠지. 쿠로오는 짧게 생각하고는 유리조각을 손에서 내려놨다.

켄마는 얼굴이 하얗게 질린 채로 쿠로오에게 다가왔고, 결국에는 호박색 큰 눈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자신의 소꿉친구를 걱정하게 한 것은 미안했으나, 쿠로오는 예전에 자해를 하고 있던 아카아시의 모습과 자신의 모습이 동일하게 여겨져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켄마는 숨죽여 울면서 물에 적신 수건으로 쿠로오의 피를 닦아내고 주변을 대충 정리한 뒤 약을 사기위해 집을 나섰다. 켄마는 집을 나가기 전까지 쿠로오에게 눈을 떼지 못했지만 응급처치가 중요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발걸음을 돌렸다.




사람이 빠져나간 집에는 무거운 공기가 떠돌았다. 쿠로오는 턱을 괴고 밖을 바라봤다. 아직도 비가 내리는 거리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오가고 있었다. 그 때, 다시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켄마가 지갑을 놓고 갔겠거니 생각한 쿠로오는 시선을 창문 쪽으로 고정했지만 작게 들리는 생소한 목소리로 인해 그는 현관문 쪽을 바라 볼 수밖에 없었다.

왜 안 왔어?”

아카아시였다. 기대도 하지 않은 사람이 자신과 한 공간에 있자 쿠로오는 당황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생각하기에 가장 추한 모습을 한 채 아카아시를 본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카아시의 상태가 평소보다 안 좋아 보였다. 쿠로오는 침대에서 일어나 아카아시에게 다가가려했지만, 이미 피를 많이 흘려 어지럼증이 찾아와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진 충격으로 인해 다시 손목의 상처가 벌어져 피가 나왔지만 쿠로오는 개의치 않고 아카아시에게 다가갔다. 믿기지 않는 현실이지만 그 현실이 사실임을 받아들인 쿠로오는 다시 온전한 사람이 되었다.

내가 오라고 했는데 왜 안 왔어?”

아카아시의 표정은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고 목소리에는 노기가 서려있었다.

설마 코즈메 때문이야?”

본인은 보쿠토를 좋아하는 주제에 그는 쿠로오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도 싫어했다. 아카아시가 제일 싫어하고 질투하는 대상이 쿠로오의 룸메이트 켄마였다. 그는 언제나 아카아시를 노려보고 반박할 수 없는 맞는 말만 지껄였다. 그리고 자신에게서 쿠로오를 뺐어갈 것 만 같았다.

아냐... 아카아시 내 말 좀..”

그 새끼 때문이지? 쿠로오가 내 말 안들을 리가 없어. 그 새끼지? 죽일 거야 죽일 거라고

제 분을 못 이겨 아카아시가 악다구니를 썼다. 아카아시는 사랑을 받으면서도 더 많은 사랑을 갈구했다. 쿠로오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사랑받기를 원했다.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며 울고 있는 아카아시를 쿠로오는 안아주고 싶었지만 몸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직도 주저앉은 채 안타깝게 아카아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아카아시는 그런 쿠로오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건지 자신을 달래주러 오지 않는 쿠로오를 원망했다.

왜... 왜 안아주러 안 오는 거야. 나 이제 싫어?”

아니 아니야. 가고 싶은데...”

내가 이래서 싫어? 쿠로오도 나 버릴 거야?”

쿠로오의 가슴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아카아시는 그 자리에 주저앉더니 무릎을 모으고 고개를 숙여 얼굴을 닫아버렸다. 울고 있는 건지 어깨가 살짝 들썩였다. 쿠로오는 이제 얼마 남아있지 않는 힘을 쥐어짜서 아카아시에게 다가가 그를 피가 떨어지는 제 팔로 안았다. 어느 샌가 쿠로오의 눈에도 눈물이 떨어졌다.

안 버려. 너는 나야.”

울고 있는 아카아시에게 쿠로오가 말했다. 아직도 밖은 비가 내렸다.




 

Der Himmel über Berlin, Wings of Desire

 


 2015.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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