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창작
한 나라가 있었다. 온화한 기후를 가진 평범한 나라였다. 하루하루 성실히 벌어먹고 살며 아이들이 천진하게 뛰어노는 일상 같은 나라였다. 백성들은 수수한 옷차림만큼 눈에 띄지 않는 소시민적인 삶을 좋아했다. 그들은 기후를 닮아 온화하고 잔잔한 성품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낮에는 각자의 일에 집중하다가 밤에 가족들이 모여 한상에 갓 찐 감자를 나눠먹는 것을 낙으로 삼는 평범한 백성들이었다.
백성들의 부모답게 그 나라의 왕 또한 온화한 성품을 가지고 있었다. 작은 영토를 가지고 있었지만 욕심내지 않고 다른 나라와 필요 없는 전쟁을 하지 않았다. 무역과 자체적 생산으로 그럭저럭 잘 돌아가는 나라를 그는 통치하고 있었다. 그래서 백성들은 왕에 대해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권력의 암투나 전쟁과 기근이 없었음으로 잔잔한 일상에 만족하며 살았다.
왕에게는 딸 하나가 있었다. 제 아비의 성정을 그대로 물려받은 딸은 사랑스러운 소녀였다. 들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하고 머리도 영리해서 학문에 대한 견식이 넓었다. 큰 사랑을 받고 자란 것은 아니었으나 알뜰살뜰한 보살핌 속에 어엿한 요조숙녀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궁전 밖 세상을 보지 못했다. 언제나 울타리 쳐져있는 궁전 안에서 생활했다. 부족한 것은 없었다. 오히려 왕의 딸이기에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른 세상이 궁금했다. 궁전조차 이렇게 넓은데 이 밖의 세계는 얼마나 더 광활하겠나 하는 생각이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그렇지만 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착한 그녀는 바깥세상에 대한 마음을 접었다. 때가 되면 알려주겠다는 아비의 말을 믿고선. 세상에 대한 궁금증을 책으로 풀어냈다. 책에는 그녀가 접하지 못한 신기한 것들을 말로써 알려줬다. 좋은 이야기, 좋은 상상들은 그녀의 긍정적 사고에 큰 바람을 불어넣었다. 두근거리는 마음을 안고 그녀는 궁전 밖의 세계에 대해 조금씩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불행하게도 왕은 죽었다. 착한 사람은 일찍 죽는 다는 말을 상기시키듯 그의 성품답게 조용히 죽음을 맞이했다. 온 나라는 슬픔에 잠겼다. 선량했던 왕은 백성들에게 사랑을 받았기에 일주일간 나라가 숙연했다. 그리고 슬픔은 기대로 바뀌었다. 말로만 들었던 공주가 이제는 여왕이 된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었다. 말로만 듣던 사랑스러운 공주 아니 여왕을 만나고 싶어서 백성들은 즉위식에 앞 다투어 나갔다.
전통 의상을 입은 여왕이 그들 앞에 나타나자 주변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눈을 감았다 뜬 그녀의 안구의 색은 황금색이었다. 백성들은 즉위식을 잊을 수 없었다.
여왕이 된 그녀는 선량하고 베풀 줄 아는 성군이었다. 화려한 드레스를 벗어던지고 가벼운 옷차림을 하고 직접 백성들이 사는 곳에 나가 그들의 고충을 들으려했다. 백성들은 약간 불편한 내색을 비췄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여왕이었으므로 어려워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농번기에 물 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그녀의 벗이었던 책에서 본 관계시설도 달아 백성들의 편의를 봤다. 점점 나아져가는 백성들의 삶을 본 그녀는 바깥세상에 대해 만족감을 느꼈다.
눈보라가 쳤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늘 같은 기후를 가지던 나라에 심한 눈보라가 왔다. 추위에 대한 대비를 하지 못한 백성들은 급하게 자신들의 몸을 보호했다. 조금만 견디면 지나갈 것이라고 저들끼리 이야기했다. 그러나 눈보라는 비키지 않았다. 꼿꼿하게 나라를 두루 삼키며 제 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다. 이제 백성들은 굶주리고 죽음의 공포에 맞닥 뜨려야했다.
‘여왕 때문이야.’
누군가 말했다. 누가 말했는지는 몰랐다. 어느새 온 백성에게 퍼진 이야기는 거의 확신으로 굳어졌다. 불안은 이상한 믿음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여왕의 눈이 저주받은 색이라서 나라가 저주 받은 거야.’
그렇다. 황금색 눈은 저주의 표식이었다. 울타리 안의 세계에서는 황금색 눈은 보호해야할 대상이었지만 울타리 밖의 세상에서는 저주였다. 백성들은 즉위식에서 봤던 그녀의 눈을 상기했다. 그녀가 여왕으로 즉위하고 별 탈 없는 생활을 영위했기에 백성들은 황금색 눈을 애써 의식하지 않으려했다. 그러나 이런 날씨가 지속되면 말이 달라졌다.
순식간에 여왕은 증오의 대상이 되었다. 여왕은 두려웠다. 백성을 사랑하고 보살핀 것뿐인데 그들은 그녀의 외면만 보고 그녀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울타리 가운데 있는 문을 걸어 잠그고 여왕은 안으로 안으로 들어갔다.
매일 밤 꾸는 꿈은 그녀를 괴롭게 만들었다. 수많은 백성들의 원망의 말들은 그녀를 시들게 만들었다. 억울한 감정이 요동칠 때면, 그녀는 제 눈을 뽑고 싶었다. 원해서 얻은 황금색 눈은 아니었다. 제 아비와 어미가 물려준 그녀가 선택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황금색 눈이라고 다른 이와 보는 것에 차이가 없음에도 사랑하는 백성들은 그녀를 증오했다.
제 눈에 대해 알지 못할 원망을 퍼붓던 그녀는 더 이상 그러지 않기로 했다. 원망해봤자 바뀌는 건 하나 없었다. 자신이 이렇게 힘들어하는 지도 모른 채 아직까지도 백성들은 그녀를 끌어내릴 모의를 하고 있었다. 백성들에게 실망감을 느낀 그녀는 이제 그러지 않기로 했다.
그녀는 냉정하고 잔인해졌다. 여왕의 권위에 도전하는 자들의 목을 베어버리고 고문시켰다. 소문의 근원지를 발본색원하여 뿌리를 잘라버렸다. 피비린내 나는 그녀의 통치는 여태까지의 아픔을 비웃듯이 그녀가 다시 바깥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게 만들었다. 사랑하던 백성들은 침묵했다.
이제는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그녀는 여왕이었다. 모든 이를 내려다보는 그녀의 시선은 위압적이고 차가웠다. 그녀의 황금색 눈은 더는 저주가 아니었다. 영롱한 황금색 눈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그녀의 황금색 눈동자는 공포이자 권위였다.
2016.01.06.
from iram
pinn_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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