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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야쿠상!!! 데리러 왔어요!!!”
평범한 아침이었다. 모처럼 받은 휴강으로 평소에 하지 못했던 문화생활을 즐기려고 막 집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초가을이지만 제법 쌀쌀한 날씨 덕에 야쿠는 얇은 코트를 입고 운동화를 신은 뒤 현관문을 닫고 있었다. 핸드폰에 이어폰을 꼽고 평소 좋아하던 플레이리스트를 터치하려던 순간 뒤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누군가의 목소리 덕에 깜짝 놀라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조용한 주택가라서 여태까지 살면서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던 터라 무례한 사람이 누군가 궁금해져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뒤에 있는 남자는 키가 매우 컸다. 저렇게 키가 큰 사람은 처음 본 터라 야쿠는 벌어지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은발의 남자는 이국적인 초록색 눈동자를 가지고 있었고 모델인가 싶을 정도로 잡지에 나올 법한 의상을 입고 있었다. 손을 흔들고 다가오는 꼴이 마치 자신을 안다는 말을 하는 것 같아서 야쿠는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야쿠상!!!”
성큼성큼 걸어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는 야쿠의 손을 덥석 잡더니 과장된 몸짓으로 붕붕 흔들었다. 그리고 갑자기 자신을 한 품에 껴안는 남자 때문에 야쿠는 까무러치게 놀랐다.
“뭐…뭐하시는거에요!!!”
“에?”
“저 아세요?”
있는 힘껏 밀어내니 약간 물러선 남자는—겨우 한 뼘 될까말까한 거리였다—이상하다는 표정을 짓고는 다시 야쿠에게 말했다.
“야쿠 모리스케 아니에요?”
“제 이름이 맞긴 한데…”
“아 그럼 야쿠상 맞잖아요!!!”
뜻밖의 남자에게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자 야쿠는 당황스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곧바로 자신이 맞다고 말하니 남자는 겨우 벌려놨던 거리를 좁히면서 포옹했다.
“아니 누구시기에 자꾸 이러시는 거예요!”
“저 기억 못 하세요?”
“네…? 잘 모르겠는데…”
“하이바 리에프요!!! 나중에 꼭 야쿠상 데리러 온다고 했잖아요!!!”
“하이바…리에프…?”
네, 맞다구요. 앞의 남자는 발을 쿵쿵 굴리면서 자신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하이바 리에프, 하이바 리에프. 아— 어렴풋한 기억이 야쿠의 머릿속에서 스멀스멀 올라왔다. 아마 중학교 때였던 것 같다. 옆집에 살던 남자 아이. 일본인 아버지와 러시아인 어머니를 둔 조그맣던 남자아이는 은발에 초록색 눈을 가지고 있었다. 이국적인 외모로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지내지 못 해서 매일 놀이터에 혼자 있는 모습이 안쓰러워 야쿠가 자주 놀아주던 남자애였다. 착하고 개구진 아이라서 나이 차이는 조금 났지만 야쿠도 꽤나 재밌게 놀았었다. 그리고 친해진지 불과 3개월 남짓 되었을 때, 갑자기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러시아로 떠난다고 했다. 자신을 잘 따르던 동생 한 명이 사라짐에 야쿠는 속상한 마음이 들어 며칠을 우울하게 보냈다. 그리고 그 남자아이는 떠나기 전에 야쿠의 방에서 야쿠를 바라보면서 말했다.
‘야쿠상! 다음에 오면 저랑 결혼해주세여!’
‘에? 남자랑 남자는 결혼 못 해…”
‘아니에여!!! 저는 야쿠상 무지무지 좋아하니깐 꼭 결혼할거에여!’
아직 연애도 모르고 사랑도 모르는 귀여운 남자아이의 진지한 얼굴을 바라보면서 야쿠는 피식 웃고 마지막인데 이정도 장단은 맞춰줄 수 있지 하는 마음으로 대답해 주었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꼭 결혼하자. 데리러와야한다?’
‘꼭 멋진 남자가 되서 야쿠상 데리러 오겠슴다!!!’
‘그래그래. 꼭 데리러와. 나 잊으면 안 돼.’
‘네!!! 절대절대 안 잊슴다!!! 다음에 제가 데리러오면 저랑 꼭 결혼해주세요, 야쿠상!!!’
잊고 살았던 생각이 하나가 튀어나오자 팝콘 튀기듯 부풀려져서 툭툭 수면 위로 올라왔다. 설마 그러면.
“파란 지붕에 살았던 그 리에프야?”
“이제 기억하시는 거에여?”
“러시아 갔다고 그러지 않았어?”
“아버지 사업이 끝나서 지난주에 일본으로 다시 돌아왔슴다!”
자랑스럽다는 듯이 자신의 가슴을 팡팡 치면서 말하는 리에프를 보니 반갑기도하고 얼떨떨한 마음이 교차하는 야쿠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다 아직까지도 자신을 껴안고 있는 리에프의 팔을 풀어보려 몸을 살짝 움직였다. 그러나 단단하게 감싸고 있는 그의 팔은 풀어줄 의지가 전혀 없어보였다.
“리에프…이 것 좀…”
“아, 근데 야쿠상.”
“응?”
“데리러 왔어여.”
그는 자신의 무릎을 굽혀 야쿠와 시선을 맞추더니 얼굴을 천천히 앞으로 숙여 야쿠의 입에 자신의 입을 맞췄다.
“저랑 결혼해주세요, 야쿠상.”
2015.1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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