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흑] 22

pinn_pond 2015. 10. 19. 01:17


22

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미국은 몇 번 와도 적응이 안 되는 거 같네요.”

옅은 하늘색 머리가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머금어 진짜 하늘같아 보였다. 히무로는 얇은 쿠로코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것을 좋아했다. 손을 뻗어 쿠로코의 머리카락을 만지니 간지럽다는 듯 어깨를 살짝 움츠렸지만 이내 눈을 감고 그대로 히무로가 만지는 손길을 느꼈다. 쿠로코에게 누군가가 만진다는 것이 기쁜 일이라는 걸 깨닫게 해준 건 히무로였다.

얌전히 자신의 손길을 받고 있는 쿠로코를 보면서 히무로는 주인에게 핸들링을 받고 있는 햄스터 같다고 생각했다. 남들은 쿠로코에게 감정 표현이 부족하다고 지적했지만, 히무로는 그 말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자신이 아는 쿠로코 테츠야는 표현이 남들보다 눈에 띄지 않을 뿐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했다.

그것을 자신만 안다는 것은 좋은 일이었다. 그래서 굳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려 생각하지도 않았다. 독점욕 일까. 히무로는 생각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투명한 눈동자가 자신을 향하자 히무로는 미소를 지어보였다. 좋았다. 맑고 깨끗한 쿠로코를 바라볼 때면 농구 시합처럼 가슴이 뛰고 모든 걸 잊게 해주었다. 사람과 사람이 부딪친다는 면에서는 농구시합과 유사했지만 사랑은 그 보다 더 심오한 것이라 히무로는 쿠로코를 대할 때면 가끔씩 어떻게 해야 할지 혼동이 왔다. 아무래도 쿠로코가 본인의 감정을 생각보다 자주 표현하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

장거리 연애라 그런지 히무로는 더 애가 탔다. 히무로는 대학을 미국으로 진학했기 때문에 현재 미국에서 거주중이라 일본에서 대학을 다니는 쿠로코와는 애석하게도 가장 불이 붙는 다는 연애 초기에 떨어져서 지내야했다. 물론 라인이나 스카이프를 통해 자주 대화를 나누긴 했지만 백문이 불여일견. 직접 얼굴을 대고 한 번 보느니만 못했다. 그마저도 시차가 꽤 나서 통화를 길게 할 수 없기에 히무로는 애가 탔다.

그에 반해 쿠로코는 표현이 부족했다. 짧은 통화가 끝날 때도 아쉬운 듯한 말투였지만, 어느 쪽으로나 더 큰 아쉬움을 표현하는 것은 히무로였다. 그래도 이정도의 감정표현을 해주는 것이 어디냐 싶으면서도 더한 것을 바라는 게 사람이었다. 약간의 감정 표현에 기쁜 마음 반절, 자신만 애가 타는 것 같은 섭섭한 마음 반절. 서로 다른 마음이 히무로 안에서 격렬하게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별거 아냐. 쿠로코 아이스크림 먹을래?”

멀리 떨어진 푸드 트럭을 가리키면서 히무로가 말하자 쿠로코는 곰곰이 생각해보더니 작은 얼굴을 움직여 끄덕였다.

, 먹고 싶어요. 바닐라 맛으로요.”

바닐라와 쿠로코. 히무로는 둘의 조합이 꽤 어울린다 생각했다.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쿠로코를 두고 혼자 트럭으로 달려가 아이스크림 두개를 주문했다. 수제 아이스크림이라고 선전하고 있는 푸드 트럭 안의 아이스크림 들은 꽤나 맛있어보였다. 하는 콘에 하나는 컵에 담은 아이스크림을 들고 히무로는 다시 쿠로코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그때 히무로 눈에 들어온 것은 여자 두 명에게 둘러싸인 쿠로코였다. 백인 여자 두 명이 쿠로코에게 무슨 말을 건네고 있었지만, 영어를 잘 하지 못하는 쿠로코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그저 여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히무로가 가까이 다가가자 여자들은 히무로를 가리키면서 속닥대더니 이내 자리를 떴다.

무슨 일이야?”

잘 모르겠습니다만.. 히무로를 가리키는 거 보니 히무로에게 관심이 있는 거 아닐까요?”

?”

잘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nice guy라는 단어를 들었습니다.”

히무로가 보기에는 분명 쿠로코에게 관심이 있어서 말을 건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평소 눈에 띄지 않고 사람들에게 관심을 그다지 받지 못하는 쿠로코는 자신에게 관심이 있다는 것을 전혀 생각하지 못하고 무조건 히무로에게 볼일이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객관적으로 볼 때도 쿠로코보다 히무로가 눈에 띄는 것은 분명했다. 히무로는 누가 보기에도 잘생긴 사람이었다.

- 그런가. , 아이스크림 녹겠다. 어서 먹어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서 히무로는 아무 말 않고 사 온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몇 마디 대화를 나눴다고 겉면이 살짝 녹은 아이스크림콘을 쿠로코는 조심스럽게 받아들었다. 쿠로코가 새빨간 혀를 내밀어 아이스크림을 핥는 것을 히무로는 빤히 바라봤다. 묘하게 선정적인 장면을 보다 쿠로코의 눈과 마주치자 히무로는 급하게 시선을 자신의 아이스크림으로 돌렸다. 쿠로코의 머리칼을 닮은 소다맛 아이스크림은 절반 정도 녹아있었다.

미국은 아이스크림도 맛있네요.”

벤치에 앉아 발을 앞뒤로 흔들면서 쿠로코가 말했다. 입술 주변에 바닐라 아이스크림이 묻어있는 것이 퍽 귀여워보였다. 히무로는 충동을 이길 수 없어서 그대로 쿠로코의 입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혀를 넣은 키스는 아니었지만 마주 댄 쿠로코의 입술을 혀로 핥아서 주변에 뭍은 아이스크림을 없애주었다.

입술에 아이스크림 묻었어.”

눈을 접어 웃는 히무로의 얼굴이 화사해보였다. 이대로 자신의 옆에 쿠로코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고, 앞에 있는 자신의 연인이 사랑스러워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자신의 그런 마음에 화답이라도 하듯이 쿠로코도 히무로에게 작은 웃음을 보여줬다.

 



일주일간 함께 있으면서 캘리포니아 이곳저곳을 돌아다닐 때, 많은 여자들이 말을 걸어 둘 만의 데이트가 방해 될 때가 많았다. 히무로가 보기에는 쿠로코는 별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모르는 사람들이 말 걸때마다 바짝 긴장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는 맑은 눈을 들어 히무로를 바라보며 도움을 구할 때, 히무로는 그를 껴안고 싶은 충동을 이길 수가 없었다.

대부분 히무로에게 관심을 보이는 여자들이었지만, 쿠로코는 자신에게 관심을 보이는 사람도 당연한 듯이 히무로에게 관심이 있어서 오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딱히 쿠로코에게 진실을 이야기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약간은 질투라는 것을 해달라는 어린 아이 같은 마음이 히무로에게는 있었다. 그러나 그런 자신의 마음을 모르는 사람마냥 쿠로코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히무로가 이끄는 대로 행동했다.

질투. 어떻게 보면 쿠로코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다. 그저 있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넘길 것은 넘기는 시냇물 같이 잔잔한 사내가 쿠로코 테츠야였다.

히무로 또한 겉으로 보기에는 늘 웃는 상이고 어떨 때는 차가워 보였지만 내면은 불과 같은 열정적인 성격인지라 그에게 질투는 어찌 보면 당연한 감정이었다. 감정 처리에 능숙하기에 표현하지 않았지만 내심 섭섭한 마음을 가진 것을 보면 히무로도 어쩔 수 없는 사랑에 빠진 남자였다. 그래도 마주보고 있는 제 연인이 사랑스러웠기에 어느 정도는 참을 수 있었다.

“Excuse me.”

둘 만의 시간을 방해하는 이질적인 목소리가 히무로와 쿠로코 사이를 가르며 들어왔다. 젊은 여성의 목소리. 히무로는 단번에 말을 건 여성이 무엇을 원하는 지, 어떤 말을 할지 대충 짐작이 가 골치가 아팠다. 더 이상 웃는 얼굴로 대할 수 없기에 히무로는 한껏 인상을 찌푸리고 뒤를 돌아보려고 했다. 그러나 불쑥 들려오는 쿠로코의 목소리 때문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Fuck off. You son of a bitch.”

“Huh?”

절대로 쿠로코의 입에서 나오리라 생각하지 않는 말들이 쏟아져 나왔다. 히무로는 앞에서 욕을 들은 여자보다도 더 놀란 눈으로 쿠로코를 바라봤다. 분명 욕이었지만 쿠로코는 평서문을 읊듯이 조곤조곤 말했다. 욕을 들은 여자는 쿠로코의 미동 없는 표정에 더 어이없어 보였다. 뭐라 반박하려고 여자가 입을 땠을 때 그보다 더 빠르게 쿠로코가 다시 말했다.

“Don’t waste our time anymore. Asshole!”

더 거친 말들이 나오자 여자는 씩씩거리면서 흥분하더니 결국 중지를 세워 보이면서 쿠로코에게 욕 몇 마디를 지껄이더니 사라졌다. 히무로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쿠로코가 귀여웠다. 아무래도 앞에 있던 여자는 욕보다 아무런 표정변화 없이 나지막이 욕을 내뱉는 쿠로코 얼굴 때문에 더 열 받았을 것으로 보였다. 영어도 잘 못하는 쿠로코가 어떻게 정확한 발음으로 욕을 했을까. 히무로는 아직까지도 큭큭대면서 쿠로코에게 물어봤다.

쿠로코, 대체 그 말은 뭐야

? 누가 말 걸면 이렇게 대답하면 된다고 해서..”

누가?”

모모이씨요..”

. 히무로는 바로 이해가 됐다. 그러니 더 웃음이 나오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여자가 쌩하니 가버린 공원에는 둘뿐이어서 시원하게 웃는 히무로의 웃음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그런 거였어. 귀여운 내 연인. 히무로는 입술에 미소가 떠나지 않은 채 쿠로코에게 말을 했다.

무슨 뜻인지 알아?”

.. 그냥 죄송하다고. 둘만 있고 싶다고. 그런 내용이라고 들었는데요..”

약간 멋쩍은 듯이 살짝 긴장하면서 쿠로코가 대답하자 히무로는 다시 크게 웃었다. 아 이건 너무 귀여워. 반칙이잖아. 당장이라도 쿠로코의 말랑한 볼을 쭉 잡아당긴 다음에 그대로 감싸 쥐고 키스를 하고 싶었다.

사실.. 히무로가 여자들한테 대시 받을 때마다 자꾸 신경 쓰여서..”

신경 쓰여?”

히무로는 잘생겨서 여성분들이 말을 많이 걸잖아요. 그래서 모모이씨한테 물어봤어요. 어제 쉬고 있는데 전화가 와서.. 자꾸 캐물으시기에 말했더니 아까처럼 말하면 된다고 하셔서..”

투명한 눈에는 거짓이 없었다. 아니 쿠로코가 거짓말을 했다고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귀여운 제 연인을 안아주고 싶었고, 몸은 이미 머리가 생각하기도 전에 쿠로코를 껴안았다. 바람이 불면서 쿠로코의 산뜻한 체향이 히무로의 코를 간질거렸다.

다시 한 번 말해주시겠습니까 쿠로코씨?”

?”

아까 영어로 한 말. 다시 말해 줘.”

쿠로코는 큰 눈을 데굴데굴 굴리더니 음. 한번하고는 입을 열었다.

“Fuck off. You son of a bitch.”

꺼져. 개년아.”

“Don’t waste our time anymore. Asshole.”

방해 하지 마. 좆같은 년아.”

쿠로코가 영어 문장을 말할 때마다 히무로가 그 해석을 덧붙여 줬다. 생각지도 않는 해석에 쿠로코는 황망한 눈으로 히무로를 바라봤다. 어쩜. 저리 귀여울까.

히무로 갑자기 왜 욕을..”

네가 한 말이야.”

터져버린 웃음은 쿠로코가 민망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덮어버릴 정도로 주체할 수 없었다.

? 저는 그런 뜻으로 말한 건 아닌데..”

대단한데? 영어 못한다더니 거짓말 아니야?”

아니라니깐요!”

쿠로코는 자신을 안은 히무로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때렸다. 놔달라는 행동. 정말 민망한지 힘이 꽤나 실려 있는 앙탈의 주먹질이었지만 히무로는 전혀 놔줄 생각이 없었다. 작은 몸을 더 세게 껴안으면서 쿠로코의 하늘하늘한 머리 위에 턱을 비볐다. 부루퉁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코에게 살짝 입맞춤을 했다.

그 정도로 여자들이 나한테 말붙이는 게 싫었어?”

히무로가 눈을 맞추며 이야기 하려 했지만 쿠로코는 자꾸 시선을 피했다. 억지로 쿠로코의 얼굴을 고정시키고 자신을 바라보게 했지만 눈을 내리 깔고 입을 삐죽 내밀고 있었다. ? 싫었냐니깐? 채근하듯이 쿠로코에게 물어보자 작은 입술이 달싹 거리면서 새가 지저귀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 질투했습니다.”

정말?”

히무로는 저만의 히무로 타츠야인데 다들 쓸데없는 관심이 너무 많아요.”

새가 아름다운 목소리로 지저귀고는 히무로의 품으로 더 파고들었다. 적당히 따듯한 체온이 히무로에게까지 전해져 그 마음마저도 도화지에 처음 칠한 물감처럼 잔잔하게 퍼져나갔다. 행복하다는 정의가 오늘따라 더 확실하게 느껴졌다. 사랑해. 이 감정을 너에게.

고마워, 쿠로코.”

?”

나에게로 와줘서 고마워.”

 

 

 

 

 

2015.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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