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흑] 春

pinn_pond 2016. 1. 31. 21:12


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봄은 낭만적임을 대변하는 계절이었다. 3월 초입의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한창 벚꽃이 만개할 무렵의 계절은 모든 사람에게 설렘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수선화와 목련은 봄의 마지막 추위를 정통으로 맞으며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피었다가 지고 아직 봉우리로 맺힌 튤립과 철쭉은 늦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채와 벚. 이 둘은 봄의 중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꽃들이었다. 그중에 히무로는 유독 벚나무를 좋아했다. 물론 일본인이라면 응당 벚을 좋아했지만 히무로는 유독 벚나무를 좋아했다.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며 연분홍빛 꽃을 피워내는 것도 좋아했으며 꽃잎이 다 떨어지고 잎만 남은 싱그러운 벚나무도 좋아했다. 그래도 모름지기 사람인지라 꽃잎이 만개한 벚나무를 더 좋아했다.

매년 봄마다 벚꽃 축제 특히 달이 내리 쬐는 밤에 벚나무를 감상하는 것을 히무로는 참 좋아했다. 그래서 쿠로코와 연인이 되고 첫 봄을 맞아 제일 먼저 했던 것은 야간 벚꽃구경이었다. 쿠로코의 하늘하늘한 머리카락은 벚꽃과 제법 잘 어울려 히무로는 자신이 좋아하는 나무와 좋아하는 사람이 그림의 한 폭에 함께 있다는 것이 못 견딜 정도로 사랑스러웠다. 그가 매년 찾아가는 벚나무는 제법 도쿄에서 유명한 나무로 연인과 함께 벚나무 아래에서 사랑을 속삭이면 그 한 해 동안은 별 탈 없이 사랑을 꾸려나갈 수 있다는 미신과도 같은 이야기가 있었다. 히무로가 미신을 믿는 남자는 아니었지만 꽤 재미난 이야기인지라 다른 연인들이 하는 것처럼 활짝 핀 벚나무 아래에서 쿠로코와 입맞춤을 하며 사랑을 속삭였다.

미신은 미신이다. 히무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최근에는 그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심정이었다. 연인 사이에서 하지 말아야할 최대 금기를 히무로는 최근 가장 많이 어기고 있었다. 의심.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은 응해주지 않았다. 왜 이런 생각을 가지게 되었는지 자신조차도 알지 못했다는 것이 코미디라면 코미디였다. 처음은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서 무조건 적으로 바라보기만 했고 용기를 내서 고백했던 날에 같은 마음이라고 말하는 상대를 믿을 수 없어서 바보같이 다시 되묻기도 했다. 그리고 교제를 시작하면서 사랑하는 상대와 여태까지와는 다른 관계를 만든다는 것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차기 전에 그의 마음에는 의심이라는 모나고 그릇된 마음이 덜컥 비집고 들어왔다.

옆에 쿠로코가 있음에도 그가 지어주는 미소와 다정한 말들에 의심하는 자신이 히무로는 스스로 미웠다. 어디서부터 자기 마음이 잘못된 건지 히무로는 알 수 없었으나 쿠로코가 주는 사랑에 대해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은 확실했다.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니었는데. 히무로는 속 좁은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답답함을 느꼈고 급기야 쿠로코가 보여주는 사소한 행동들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이걸 해줬으니 된 거야. 어제보다 더 해줬어. 어제의 나와 오늘의 자신을 저울질 하면서 비교에서 따라오는 순간적인 만족감에 기댔다. 그것이 얼마나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히무로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자신의 뒤엉킨 마음이 다스려지지 않을 거라는 걸 굳이 상기하지 않아도 잘 알았다.

때로는 자신을 질책해보기도 했다. 어째서로 시작된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빙빙 맴돌아 결국 결론은 사랑에 대한 믿음의 부족이라는 걸로 귀결됐다.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감정들이 히무로를 가득 채워서 후회를 일삼았고 쿠로코와 대화나 사랑을 나누면서도 작은 꼬투리 하나에 의심을 품는 자신을 볼 때면 어쩔 수 없구나 생각했다. 넌 그게 문제야. 알렉스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왕왕대는 기분에 히무로는 얼굴을 찌푸렸다. 그래도 자신을 걱정해주는 사람의 모습에 설핏 웃음이 나와 버려서 히무로는 계속되는 부정적인 생각을 애써 지워보려고 했다. , 그렇다고 쉽게 없어질 생각은 아니지만.

이제 곧 있으면 필거 같네요.”

정면으로 살랑살랑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맞으면서 쿠로코가 말했다. 바람에 나부끼는 사랑하는 이의 하늘색 머리를 매만져주면서 히무로는 그래 라고 짧게 대답해줬다. 함께 걷고 있는 공원에는 벚나무가 제법 있었다. 초봄의 추위를 봉우리로 맞서다가 이제 제 꽃망울 탁 틔우려는 벚꽃 봉우리를 보면서 히무로는 일주일 전의 약속을 생각했다. 그때처럼 벚꽃을 보자고 말했더니 쿠로코는 웃으면서 좋아요 라고 대답했다.

벚꽃은 어느 모습이든 예쁜 거 같아요.”

그래, 너처럼.”

예쁘다는 말은 조금 그러네요.”

쿠로코는 이런 면에서는 민감한 편이었다. 귀엽다거나 예쁘다거나 하는 말들을 들으면 늘 무표정이던 얼굴에 감정이 턱하니 튀어나왔다. 물론 히무로의 눈에는 쿠로코가 귀엽고 예뻐 보였으나 그가 이런 말들을 싫어한다는 걸 알고 나서는 되도록 안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이런 말을 들을 때면 평소와는 다르게 얼굴에 뚱한 표정이 나타나는 쿠로코의 모습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사랑스러워서 가끔씩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불만 있다는 듯이 볼에 제법 바람이 찬 쿠로코의 얼굴이 귀여워서 히무로는 살짝 볼을 꼬집고 하늘하늘 부드러운 머리칼에 손을 집어넣어 쓰다듬었다. 텅 비었던 마음이 하늘색 크레파스로 색을 채워가는 느낌에 히무로는 자신을 무겁게 짓눌렀던 생각들을 떨쳐보기로 했다.

쿠로코의 손을 감싸 쥐니 가만히 따라오는 모습에 또다시 귀여움이 느껴져 히무로는 살짝 웃었다. 쿠로코는 갑자기 웃는 히무로가 의아했으나 행복해 보이는 히무로의 표정을 바라보면서 대답하듯이 웃었다. 바람을 타고 살살 풍겨지는 풀내와 꽃내음이 둘 사이를 감싸 안아주듯이 감돌았다. 담담하게 보이는 제 작은 연인이 여기까지 함께 보조를 맞춰준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잊고 있었던 자신이 바보처럼 여겨졌다.

벚꽃구경 정말 기대됩니다.”

이번에도 예쁠 거야.”

, 히무로 씨랑 가니까요.”

저도 쿠로코 씨랑 같이 가니깐 더 아름다울 것 같습니다만.”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간질거리게 느껴져 둘은 동시에 웃음이 터져버렸다. 기뻤다. 같은 마음을 공유한다는 것이 이렇게 아름다운 일이라는 걸, 쿠로코 본인은 몰랐지만 히무로에게 차츰차츰 알려주고 있었다. 봄은 이래서 좋았다. 모든 것이 시작하는 계절. 앞서 느꼈던 의심이라는 감정마저 뒤로 밀어놓고 새롭게 출발할 수 있는 그런 마음가짐을 가질 수 있게 해주는 봄이었다. 그래서 히무로는 봄을 좋아했고 쿠로코를 사랑했다. 봄과 같은 쿠로코. 히무로에게 봄은 말 그대로 봄이었다.

 



불행하게도 비가 내렸다. 세차게 내리는 비는 아니었으나 꾸준하게 땅을 적시면서 떨어지는 비는 히무로의 마음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다른 꽃보다 벚꽃은 비에 약해서 조금만 굵은 물방울에도 꽃잎은 힘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그래서 더 조바심이 났다. 미신 같은 건 믿지 않는 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비가 내리니 겁부터 나는 건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하루하루 거리를 걸을 때마다 점점 꽃잎을 잃어가는 벚나무를 볼 때면 그의 마음도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기대감이 큰 만큼 실망감은 더해갔다. 쿠로코는 옆에서 그를 괜찮다고 다독였지만 히무로는 살짝 미소만 지을 뿐 특유의 처연한 표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늘에 깔린 먹구름만큼 그의 마음에도 잿빛이 어둑어둑 드리워졌다.

이런 히무로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쿠로코와 함께 벚꽃놀이를 가자고 한 날은 야속하게도 코앞으로 다가왔다. 외출할 때마다 보이는 거리의 풍경은 달갑지 않았다. 해는 고사하고 먹구름이 촘촘히 낀 하늘은 어둡기만 해 봄의 화려함을 질투해서 심술을 부리는 것만 같았다. 우산을 받쳐 들고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거리를 히무로는 찬찬히 살펴봤다. 보도 블록위에는 벚꽃 잎이 무성히도 떨어졌고 사람들은 무심하게 밟고 제 갈 길을 바삐 갔다. 수많은 사람 중에 거리에 떨어진 작은 꽃잎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히무로만을 제외하고는.

큰 벚나무 아래서 기도를 올리면 한 해 동안 무탈하게 연인과 보낼 수 있데.’

누가 이야기 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원래의 히무로라면 그래 그런 이야기가 있었지 하며 장난삼아 실천에 옮기고 재밌었다라고 결론지으며 연연해하지 않았을 거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의심이 그 위에 한 꺼풀 덮이면 말이 달라졌다. 사람이란 참으로도 나약한 생명체라 약간의 상처가 생기면 쉽게 좌절하고 만다. 히무로는 제 사랑 하나를 제대로 가누지 못해 미신이라는 틀에 얽매여 빠져나오지 못하고 말았다. 누구보다도 올곧은 신뢰를 바탕으로 한 사랑을 쿠로코가 한다는 걸 알면서도 인정하지를 않았다. 내리는 비에 힘없이 떨어지는 벚꽃 잎처럼 히무로도 의심이라는 비에 힘없이 떨어지는 벚꽃 잎에 불과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사랑도 이렇게 떨어지면 어떡하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끔찍한 가정들이 머릿속을 유영했다. 아니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최악의 가정을 하는 자신이 싫었다. 삶이 공정하지 않다는 것은 좌우명으로 삼을 정도로 익숙했지만 사랑에 대입하기는 쉽지 않은 노릇이었다. 의미를 가지지 않는 것에 의미가 부여되고 성숙하지 못한 감정이 충돌하게 되어 히무로의 밑바닥을 긁었다.

나를 좋아하는 쿠로코의 마음이 진짜일까.’

구차하고 올바르지 않은 감정이었다. 쿠로코는 한결같은 마음과 시선을 그에게 보냈다. 알고 있었다. 이미 알고 있었음에도 비라는 작은 풍파에 힘없이 무너지는 제 사랑이 나약해보였다. 너를 사랑하는 감정은 이리도 충만하지만 너를 믿는 마음은 메말라버린 사막에 불과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건 당연했으나 네가 나를 사랑하는 건 당연하지 않았다. 이러한 생각들을 하고 있다는 걸 쿠로코가 안다면 분명 화냈으리라 짐작했다. 화를 낼 쿠로코를 생각하니 막연하게 떠오른 그의 얼굴이 너무나도 사랑스러워 히무로는 걸음을 멈추고 조심스럽게 쿠로코를 곱씹어 봤다.

하늘빛의 머리칼과 작지만 제 품에 쏙 들어오는 키, 누구보다도 강인하면서도 따뜻한 성품 그리고 맑은 물처럼 투명이 자신을 비추는 그의 눈. 어디 하나 사랑스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우산을 살짝 비켜 위를 올려다봤다. 하늘이 먹구름에 가리어져 있었다. 하늘을 닮은 그가 흐려진 먹구름 같은 자신의 마음에 덮인 것 같아서 불편해졌다. 그렇지만 마냥 이렇게만 있을 순 없었다. 히무로는 자신을 기다리는 쿠로코를 위해 불안한 생각들을 애써 떨치고는 걸음을 옮겼다.

 



오지 않길 빌었던 날이 왔다. 궂은 날씨와는 상관없다는 쿠로코의 말 때문에 히무로는 집에 있자는 제 뜻을 끝끝내 관철시키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승용차에 타면서 까지도 마지못해 끌려나온 것처럼 표정이 어두운 히무로를 보면서 쿠로코는 운전대를 잡은 그의 손을 슬쩍 자신의 손으로 덮었다. 갑작스러운 쿠로코의 스킨십에 놀란 히무로가 아래를 바라보자 그는 환한 웃음으로 보답해주었다. 마치 걱정하지 말라는 듯, 자신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는 아는 것 같았으나 굳이 짚어 이야기 하지 않는 쿠로코의 따듯한 마음을 느껴 히무로는 약간 기분이 누그러졌다.

미도리마였나, 그 사람이랑 다를 게 하나도 없군. 늘 오늘의 오하아사를 챙겨보고 행운의 아이템을 소지하지 않으면 밖으로 나가지 않는 기적의 세대 일원 하나를 생각하며 히무로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른다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래도 손끝부터 느껴지는 연인의 따스한 감촉에 위로를 받고 있기에 더 이상 자신을 괴롭히지 않기로 했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꾸며나가기도 벅찬 하루하루였으므로 지금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기로 마음먹었다.

이미 여러 번 온 길이라 익숙한 코너를 돌면서 히무로는 들리는 노래 선율을 따라 핸들을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いたばかりのるのを

 갓 피어난 꽃이 지는 걸

今年いね残念そうに

 '올해도 빠르네'라고 아쉬운 듯

ていたあなたはとても

 보고 있던 당신은 정말

きれいだった もし

 아름다웠어 만약 지금의 날

れたなら どううでしょう

 볼 수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あなたなしできてる

 당신 없이 살아가는 나를

Everybody finds love

 모두 사랑을 찾고 있어

In the end

 결국에는

 

평소에 히무로와 쿠로코 둘 다 좋아하는 음악이라 카오디오 플레이 리스트에서 빠진 적이 없는 노래였다. 우타다 히카루의 벚꽃흐름(桜流). 조수석을 살짝 보니 쿠로코 또한 창 밖에 내리는 이슬비를 바라보면서 나오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もう二度えないなんてじられない

 이제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니 믿을 수 없어

まだえていない

 아직 아무것도 전하지 못했는데

いたばかりのるのを

 갓 피어난 꽃이 지는 걸

ていた木立瀬無きかな

 바라보던 나무들의 마음을 달랠 길은 없지만

 

갑자기 목에 가시가 턱하니 걸린 기분이었다. 여느 때라면 히무로가 우타다 히카루의 목소리는 최고라고 운을 떼면서 이야기를 했을 터인데, 오늘따라 노랫말이 구슬프게 들렸다. 벚꽃이 지는 걸 보면서 떠나보낸 아직까지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 담담하게 풀어나가는 선율이 애써 다잡았던 히무로의 마음을 요동치게 만들었다. 점점 고조되지만 목청껏 높여 부르지 않고 지금까지도 전하지 못한 자신의 사랑을 아쉬워하면서 이제는 사랑에 대해 눈 돌리지 않겠다는 가사가 뼈아프게 다가왔다. 진부한 이야기처럼 노래 속의 주인공이 자신이 된 것만 같았다. 다른 게 있다면 노래의 주인공은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냈지만 히무로는 그러지 않았다. 그럼에도 히무로가 노래에 묘하게 공감하는 건 아마도 쿠로코가 보내주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가 아닐까.

더는 노랫말이 들리지 않았다. 마지막도 처음과 같이 담담하게 끝나가는 노래의 뒤에는 피아노 선율이 잔잔하게 깔렸다. 시작과 끝이 같다는 어느 영화의 대사처럼 비와 피아노가 어우러지면서 노래는 그렇게 끝났다. 곧이어 다른 노래가 나왔지만 히무로는 카오디오 자체를 꺼버렸다. 더는 노래를 들을 기분이 들지 않아서였다.

침묵은 침묵을 부르고 자동차와 빗방울이 만나 투둑거리는 소리만이 침묵 사이를 메꾸려고 애를 썼다. 그 누구도 먼저 깨려고 하지 않는 두터운 침묵의 벽은 공원에 도착하고 조심스럽게 무너졌다. 공원에는 드문드문 우산을 쓰고 걸어 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는데, 전에 북적거리던 인파에 비하면 한참 적은 인원이었다. 여유롭게 즐길 수 있을 거라 생각이 드는 한편, 벚꽃이 이미 다 떨어졌기 때문에 사람들이 오지 않았다는 생각에 점점 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쿠로코와 나란히 우산을 쓰고 가면서 히무로는 조금은 남아있지 않을까 하는 마지막 희망을 가졌다.

결국, 마지막 희망도 비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공원 정 중앙에 있는 큰 벚나무는 이미 다른 색을 잃어버리고 녹음만 가득했다. 나무 아래에는 꽃잎의 흔적은커녕 빗물에 흥건히 젖은 흙과 잔디만 있었다. 최악의 최악. 히무로는 현실을 부정해보려 애써 눈을 감아봤다. 그러나 눈을 감아도 선명히 나타난 비를 맞고 있는 처량한 벚나무 덕에 억지로 막아놨던 감정의 둑이 요란하게 터져 나왔다. 티를 내지 않으려 마음을 추슬러 봤으나 우산을 잡은 손이 미약하게나마 떨리는 것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아아, 쿠로코는 아마 날 사랑하지 않

히무로상.”

떨리는 손이 잡히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감았던 눈을 뜨고 저를 바라보는 시선에 눈동자를 맞추니 청명한 하늘보다도 푸르른 눈이 히무로를 듬뿍 담고 있었다. 그 눈에 말문이 막힌 히무로는 그저 그의 시선에 화답해주기 급급했다.

잠깐 저와 동행해주시겠습니까?”

정중한 부탁. 쿠로코는 히무로의 안색을 살며시 살피며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그 태도가 자신과 거리를 둘려 한다고 왜곡해서 생각해버린 히무로는 제 스스로에 깜짝 놀라 쿠로코의 물음에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으신가요?”

, 아니. 그럴 리가.”

그렇다면 가죠.”

자신보다 작은 손이 자신의 손 전체를 그러쥐고 어딘가로 이끌었다. 앞장서서 가는 쿠로코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도 히무로는 애써 불안한 마음을 감춰보려고 했다. 한참을 따라 걷다 물 웅덩이를 몇 개 건너뛰고 쿠로코의 바쁜 걸음이 멈췄다. 그에 맞춰 히무로의 발걸음도 멈췄지만 앞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었다. 그 때, 몸을 돌려 쿠로코가 히무로를 마주봤다.

앞을 봐주세요, 히무로상.”

쿠로코의 키에 맞춰 약간 아래로 기울었던 우산은 히무로의 시선을 가리고 있었다. 우산살을 따라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다 이내 우산을 위로 올리고 제 앞을 바라봤다.

눈에 스미는 풍경은 히무로의 입을 벌어지게 만들었다. 크게 우거진 고목들 사이에 작은 벚나무 하나가 가로등의 빛을 끝자락에 걸쳐 받으며 아담하게 서있었다. 히무로보다 세 뼘 정도 클까싶은 벚나무는 고목들이 가려줘서 제 꽃잎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리 풍성하지는 않았지만 제법 실한 벚나무는 촘촘하게 나뭇잎과 벚꽃 잎을 품고 있었다.

여기에도 벚나무가 있습니다. 그러니깐.”

쿠로코는 히무로를 바라보며 이야기하다가 잠깐 숨을 골랐다.

그러니깐 이번 년도에는 여기에서 약속해요.”

, 테츠야. 너는.

 

どんなにくたってらさないよ

 아무리 두려워도 눈을 돌리지 않을 거야

てのわりにがあるなら

 모든 것의 끝에 사랑이 있다면

 

돌연 생각난 마지막 가사에 히무로는 쿠로코의 마음이 느껴져 울컥거림을 주체할 수 없었다. 눈물이 볼을 타고 한 줄기 흘러내렸다. 아직까지도 비는 하염없이 내리고 있었지만 히무로의 내면은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침침한 것들이 쿠로코라는 비에 씻겨 내려간 것일까. 파도처럼 밀려드는 감정의 연속들은 마지막까지 그를 붙잡고 놔주지 않았던 의심과 불안이라는 찌꺼기들을 한꺼번에 데리고 갔다. 분명 아까 전에는 들리지 않았는데 이제는 더없이 선명하게 보이는 노랫말과 그보다 더 확실한 감정의 표현으로 자신에게 사랑을 전달하는 쿠로코. 사랑에 대한 확신이 없어 모든 것에 눈을 돌린 자신과는 다르게 한결같은 마음을 보내는 자신의 연인은 비교 불가였다. 사랑이 바로 옆에 있었음에도 눈 먼 사람처럼 보지 못하고 사랑을 찾고 있었다.

확실하게 느껴지는 사랑은 히무로를 한 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 저 자라나는 벚나무처럼 이제 둘의 사랑도 자라날 것이라는 기분 좋은 예감이 스쳤다. 봄의 끝자락을 화려하게 장식해주는 벚꽃 잎이 비를 타고 그들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이미 군데군데 벚꽃 잎이 붙은 쿠로코의 하늘색 머리칼을 바라보다가 살포시 웃음이 나왔다.

왜 웃는 건가요.”

머리카락 위에 벚꽃이 있어서

쿠로코는 앗 하더니 머리를 휘휘 내저으면서 벚꽃을 털어내려 했다. 그렇지만 습기를 흠뻑 먹은 머리카락과 벚꽃은 한 몸이 되다시피 해, 쿠로코의 작은 저항으로는 떼어지지 않았다. 그 귀여운 모습을 잠시 바라보다가 히무로가 손을 들어 그의 머리칼을 손으로 쥐었다. 한 잎, 두 잎. 하늘색과 조화된 희기도 하고 분홍빛이 돌기도 한 꽃잎을 떼어내면서 아쉽다는 생각도 했다. 히무로가 보기에는 제법 잘 어울려보였다.

다 됐다.”

감사합니다.”

어쩐지 쿠로코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는 게 아쉬웠다. 그래서 손을 잡아 제 품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쿠로코는 마치 히무로의 품에 딱 맞게 설계된 사람처럼 담뿍 안겼다. 풀냄새와 비냄새, 희미하게 남아있는 벚꽃향과 아래서부터 올라오는 쿠로코의 체향이 히무로의 비어있던 공간을 차츰차츰 채워줬다.

엄청난 계획이 아니더라도, 큰 벚꽃나무가 아니더라도 사랑을 나누고 속삭이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 오로지 화려한 겉면만 쫓으면서 정작 중요한 거에는 소홀했던 자신을 히무로는 반성했다. 그리고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주고 참된 사랑을 알게끔 해준 자신의 연인이 더없이 사랑스러웠다.

쿠로코 아니 테츠야.”

?”

올 한해도 잘 부탁드립니다.”

살짝 고개를 숙이고 두 손을 들어 쿠로코의 뺨을 감쌌다. 눈을 맞추고 코를 맞추고 끝으로 입을 맞췄다. 차갑기도 하고 따뜻하기도 한 입술이 겹치면서 둘이었던 마음이 비로소 하나가 되었다. 쏴아아. 바람이 불면서 작은 벚나무가 부대끼며 벚꽃 잎이 그들 위로 떨어졌다.

사랑해, 테츠야.”

맹세였다. 너에게 하는 맹세, 나에게 하는 맹세.

저도 사랑합니다.”

너의 대답.

모든 끝에 사랑이 있다면 바로 너야. 쿠로코 테츠야. 이 사랑을 담아 너에게.

 

 

 

 

 

 

2016.01.31.

with wowhoo

Spring of four seasons

Happy Birthday Kurok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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