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흑] -17

pinn_pond 2016. 2. 5. 00:43


-17

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 여러 안주와 술병들이 즐비해 있는 탁자가 크게 요동쳤다. 원인은 바로 금발의 남자였는데 무엇인가 아주 분하다는 얼굴로 몸을 떨면서 서있었다. 그가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기 때문에 큰 소리가 났던 거였다. 술집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금발 남자에게로 향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제각각 원래 향했던 곳으로 눈길을 거뒀다. 그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금발 남자는 제 앞에 있는 까무잡잡한 남자를 보고 쏘아댔다.

아오미넷치는 늘 그게 문제임다!”

? 키세 또 시작이냐.”

앞에서 떠들어대는 금발 남자가 귀찮다는 듯 아오미넷치라 불린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그 태도에 열이 받은 키세는 다시금 입을 벌려 말했다.

메시지에 답해주는 게 얼마나 어렵다고 매번 그 모양임까!”

그런 거 질색이라고. 계집애들처럼 무슨…….”

계집애요? 지금 저보고 계집애라고 한검까?”

야 넌 또 뭘 그렇게

맞잖슴까. 너는 항상 그런 식이죠.”

이제 나이 좀 먹었다고 말싸움 인가요. 쿠로코는 앞에 놓인 사케 한 모금을 마시며 생각했다. 예전이었으면 이미 주먹으로 치고받고 하며 둘 중 한명이 코피가 터질 때까지 싸웠을 텐데 나이 들었다고 몸 사리는 걸 보면 웃기기도 했다. 지치지도 않은지 술집에 들어 올 때부터 투닥거리더니 결국엔 말싸움까지 번졌다. 아직까지도 저러는 걸 보면 연애란게 참 징글징글 한 거 같아 보였다.

그럼 원온원해여! 그걸로 승부내져.”

? 너 이길거라 생각하는거야?”

물론임다!!! 아오미넷치한테 이번엔 안질검다.”

백년은 이르다.”

아오미네는 어디서 났는지 농구공을 들며 말하는 키세를 보고 피식 웃곤 앞장서서 먼저 나갔다. 이어 뒤따라나간 키세까지 북적였던 탁자가 순식간에 휑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둘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어보였다. 아카시와 미도리마는 다음에 기적의 세대 신년회를 할 팬션을 알아보고 있는 중이었고 무라사키바라와 카가미는 이미 안주에 정신이 팔려 다른 건 눈에도 안 들어오는 것 같았다.

조용해진 술집에서 쿠로코는 자작하고 있었다. 원래 술을 마실 때 조용히 마시는 타입이라 이렇게 자신에게 신경 쓰지 않는 게 오히려 편했다. 알맞은 온도로 덥혀진 사케를 마시면서 앞에 놓인 어묵 꼬치를 괜히 쿡쿡 찔러봤다. 안주를 즐겨 먹는 편은 아니었으나 내일 뒤탈이 없으려면 어느 정도 안주를 먹어야했다. 제일 작은 네모난 어묵 꼬치를 들고 한입 베어물려 했을 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 늦어서 미안.”

무로칭. 왤케 늦은 거야.”

차가 좀 막혀서.”

타츠야! 여기 앉어.”

검은 머리의 사내가 들어와 무라사키바라와 짧게 대화하더니 카가미가 일어나 제 옆에 앉혔다. 카가미의 옆이라 함은 쿠로코의 앞자리였다. 비어있던 앞자리가 차자 쿠로코는 돌연 답답함을 느껴 앞에 있는 사케를 쭉 들이켰다. 코끝까지 올라오는 술향에 약간 머리가 핑 돌았다.

안녕, 쿠로코.”

안녕하세요, 히무로상.”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쿠로코에게 히무로 타츠야는 기적의 세대 일원이었던 무라사키바라의 팀메이트이였던 사람이자 카가미 타이가의 친구일 뿐이었다. 따로 사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본 적이 없어 친해질 기회조차 없었다. 결정적으로 쿠로코는 그가 불편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였다기 보다는 그가 가끔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부담스러웠다. 마치 물로 온몸을 감싸 서서히 옥죄어 밑으로 끌어당기는 기분이었다.

검은 머리칼로 가려진 눈은 언제나 웃고 있었지만 특유의 분위기는 함부로 다가가지 못할 것 같은 인상을 주었다. 쿠로코는 자신도 모르게 히무로를 의식하고 있었다. 그에 대한 반증으로 지금도 최대한 그를 신경 쓰지 않으려 했으나 힐끔힐끔 그의 눈치를 보느라 아까부터 사케잔이 비어있었다.

그리고 그와 시선이 갑자가 맞닥뜨린 나머지 비어있는 사케잔을 들어 입에 가져다 댔다. 나올 리 없는 사케잔의 각도만 들어 올리다 안에 술이 없다는 걸 깨닫고는 황급히 제자리에 잔을 내려놨다. 정신을 차리고 앞에 있는 사케병을 들어 잔에 따랐으나 얼마 나오지 않고 그쳤다.

내가 따라 줄까?”

쿠로코의 몸이 튀어 올랐다. 어느새 쿠로코의 옆에 앉아 있는 히무로는 특유의 웃음을 지어보이며 쿠로코에게 사케병을 들이밀었다. 사케 입구 사이로 새어나오는 술 향기와 술집 특유의 잔잔한 음악 분위기에 휩쓸려 쿠로코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병에서 나와 잔으로 들어가는 사케의 색이 유독 투명해보였다.

한 모금 머금어 목으로 넘겼다. 부드럽게 들어가는 사케가 자작할 때보다 더 맛있는 건 기분 탓이려나. 쿠로코도 병을 들어 제 옆에 앉은 사람의 잔에 사케를 따랐다. 입가에서 떠나보내지 않는 미소를 지으면서 히무로는 쿠로코가 따른 사케를 마셨다. 한 잔, 두 잔, 잔은 더해갔지만 말 수는 없었다.

점점 더해지는 술기운과 반대로 어색해져만 가는 히무로와의 관계 때문에 쿠로코는 몸이 쑤셨다. 정신이 불편함을 이기지 못해 이만 집에 가봐야겠다는 거짓말을 하며 일어나려 했다.

저는 이만!”

순간, 사케향과 텁텁한 술집 특유의 냄새가 사라지고 은은한 시트러스 향이 쿠로코의 전신을 부드럽게 감쌌다. 그 향은 그대로 쿠로코의 입 속 안으로 들어와 사케로 덥혀졌던 쿠로코의 혀를 시원하게 만들어줬다. 쑥 들어온 타인의 혀는 원래부터 제 것인 마냥 쿠로코의 혀를 쉽게 어루만졌다. 한데 섞였다가도 입천장을 쓸어 간지럽히면서 물 만난 물고기처럼 마음껏 유영했다.

애초부터 호흡이 고르지 못했던 쿠로코가 힘을 줘서 히무로를 밀어냈다. 찐득한 타액이 쿠로코의 입술을 따라 떨어졌고 자신의 앞에는 살짝 상기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는 히무로가 있었다. 지금 자신은 그와 키스를 했다. 순간 확 올라오는 부끄러움에 쿠로코는 옆에 있던 코트와 가방을 집어 들었다.

저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들릴 듯 말 듯 작게 이야기한 쿠로코는 누가 대답하기도 전에 재빠르게 술집을 빠져나왔다. 차디찬 바깥 공기가 뺨에 닿으니 부끄러움에 올라왔던 열기가 조금이나마 진정되는 느낌이었다. 더는 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로지 쿠로코를 덮고 있는 건 시트러스향 뿐이었다.

 



, . 알겠습니다, 카가미군.”

쿠로코는 통화를 마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너무 늦는다며 재촉전화가 카가미에게 온 터라 쿠로코는 제법 느긋하게 걷고 있었던 걸음을 재촉했다. 익숙하다면 익숙한 거리를 걸으면서 오늘 초대받은 식사의 메뉴를 생각했어야 했지만 그의 머릿속에는 온통 다른 생각뿐이었다.

한 달 전에 있었던 술집에서 일어난 해프닝. 단순히 해프닝으로 취급하기에는 쿠로코에겐 너무나 혼란스럽고 당황스러웠던 경험이었다. 첫 입맞춤, 그것도 같은 남자이자 친하지도 않던 사람과의 키스였다. 뜨겁기도 하고 차갑기도 했으며 온통 그의 향에 취해버렸던 지난번의 키스는 근 한 달 간 쿠로코를 들었다 놨다 했다.

히무로 타츠야. 잊을 수 없었고 잊히지 않는 남자는 쿠로코를 잠식해나갔다. 그날 집에 돌아와 술집에 있었던 일을 되짚어 봤을 때, 자신이 어째서 그를 불편해 했는지 그의 눈빛을 피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을 애정과 정욕이 뒤범벅된 시선으로 탐을 내고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쿠로코는 당황스러움이 밀려왔다. 어째서일까. 접점도 없는 나를 그는 어떻게 그런 눈으로 바라볼 수 있을까.

답이 나오지 않는 물음들만 스스로에게 던졌다. 그가 아니면 정의 내릴 수 없는 수 만 가지의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나타났다. 그에게 물어보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는 걸 알았지만 그리 할 순 없었다.

담장 너머로 뻗어 나온 개나리를 바라봤다. 추위를 이겨내고 봉우리를 틔운 개나리는 그 자체만으로도 아름다웠다. 개나리 옆에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고드름이 얼어있었다. 고드름. 얼음. . 생각의 끝에 나온 그의 이름에 쿠로코는 소스라치게 놀랬다. 늘 이런식으로 쿠로코의 생각 끝에 그 남자가 존재했다. 개나리와 고드름처럼 자신과 히무로는 어울리지 않았다. 남자와 남자였으므로. 어떠한 접점도 없었음으로.

숱한 감정들이 오갔지만 쿠로코는 정리하기로 했다. 의미 없는 키스였을 뿐이었고 의미 없는 그에 대한 생각들이었다. 그를 더 이상 만나지 않으면 그런 눈빛을 받으며 혼란스러워할 필요가 없었다. 간단했다. 애초부터 그와는 만날 특별한 이유도 없었기 때문에 이제껏 살아왔던 것처럼 남인 채 살아가면 되었다. 더는 휘둘리지 않을 거야. 쿠로코는 주먹을 꽉 쥐었다.

어느덧 카가미 집 앞에 도착했다. 오늘 카가미의 요리를 먹으면서 그런 일이 있었지 하며 웃어넘기면 되는 거였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와 전처럼 살면 되는 거였다.

딩동

초인종 소리가 나면서 집 안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저 하얀색 대문이 열리면 난 그 날의 모든 걸 잊는 거야. 쿠로코는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 듯이 중얼거렸다.

어서와.”

그리고 쿠로코는 잊을 수 없었다. 그가, 히무로 타츠야가 눈앞에 서있었다.

 

 

 

 

 

 

2016.0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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