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루사와] -18

pinn_pond 2016. 2. 20. 19:55


-18

후루야 사토루/사와무라 에이준

 

 

 

 

너는 대체 어째서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일까. 그래, 너는 처음 본 그날부터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어. 크고 예쁜 너의 눈은 오로지 그 사람만을 담았다. 나 역시도 그 사람을 원하기는 했지만 그 의미가 너와 다르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내 삐딱한 시선은 너의 시선을 가지지 못한 탓을 너에게로 돌렸다. 감히 너란 사람을 마음에 품은 건 내 멋대로 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사랑이란 추상적인 감정은 처음이었다. 생경한 감정이었음에도 난 널 본 순간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우울했다. 네 모든 시선 끝에는 다른 사람들이 걸려있었고 네 모든 말 속에는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있었다.

특히나 너는 그를 그리고 그들을 따랐다. 투수라는 포지션이 포수라는 포지션에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다는 건 나도 알았다. 나도 투수였기에 알 수 있었지만 사람마음이라는 게 참 간사해서 머리론 알고 있었으나 인정하기 싫었다. 네 올곧고 반짝이는 눈동자는 나를 바라보기 위해 만들어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모든 것에 반대인 너와 나였기에 난 너에게 끌렸다. 너는 올곧았고 나는 정체되었으며 너는 반짝이는 눈이었고 나는 감정 없는 눈이었다. 하물며 너는 좌완이었고 나는 우완이었다. 나와는 반대인 네가 어쩌면 공허한 내 부분을 채워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기가 막히게도 너는 내 빈 공간들을 너로 채워나갔다.

부끄럽게도 내 마음은 이러했다. 나를 라이벌로 여기고 의식하는 널 보며 그만한 관심이라도 받는 것에 희열을 느꼈다. 내가 원하던 관계와는 전혀 달랐지만 이렇게라도 너와 내 사이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다. 그래서 공식적으로 다른 이들 앞에서 너와 라이벌 선언을 했다. 이렇게 하면 모두들 너와 내 사이에 대해 조금이라도 생각을 할 거라 여겼기 때문이었다. 그만큼 나는 너와 내 사이를 정의할 무엇인가가 필요했던 걸 수도 있다. 그때부터 너에 대한 내 마음이 더 커졌다. 야구만을 알았고 야구만 바라봤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너는 쥐도 새도 모르게 내 안에 네 자리를 더욱 넓혔다. 그리고 이내 나는 네 옆자리에 나란히 설 수 없다는 사실에 좌절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연습이 끝나고 운동장을 도는 널 따라 함께 뛰는 것뿐이었다. 너와 함께 뛰는 날 보며 다들 역시 라이벌이라며 경쟁을 부추겼다. 그러나 나에게 이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했다. 숨이 차올라 턱 밑까지 내려오는 연습이 끝나면 온 몸에 힘이 풀렸다. 야구공의 실밥을 잡던 검지와 중지는 구부릴 수 없을 정도로 경련이 왔고 무리한 구보를 하며 근육 트레이닝을 한 허벅지의 근육은 터질 것 같이 아려왔다. 그럼에도 네가 운동장을 뛰고 있기에 뛰었다. 치기어린 경쟁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나는 주전이었고 너는 주전이 아니었다. 연습하는 공간도 달랐고 연습하는 매뉴얼도 달랐다. 너와 같은 공간에 있었지만 같이 있지 않았다. 트레이닝은 내가 너에게 집중할 수 없게 만들었고 너에 대한 생각을 희미하게 만들었다. 그렇지만 그 와중에도 나는 널 잊은 적이 없었다. 오히려 힘들수록 너는 네 목소리를 높여 나에게 네 존재를 확실하게 각인시켰다. 너의 목소리는 마치 단물처럼 거친 호흡으로 버석거리는 입안을 빠르게 적셔줬다. 너와 함께 달리는 이 시간이 여태까지 힘들게 트레이닝 했던 시간들의 보상이라 여겼다. 어둑어둑해진 운동장을 희미한 가로등에 의지해 네 뒷모습을 쫓아가는 건 즐겁기도 했으나 기분이 묘했다. 널 잡을 수 없었다. 비록 달리기였음에도 너와 내 관계처럼 난 네 뒷모습만 좇았고 넌 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앞만 보며 달렸다. 끝끝내 널 잡을 수 없는 난 얼굴을 따라 흐르는 땀을 손을 훔쳐내고 욕지기가 섞인 더운 숨을 내뱉었다. 무릎에 손을 얹고 거친 호흡을 고르고 있자면 너는 어느새 다가와 웃으면서 나에게 말했다.

내가 이겼어, 후루야.’

땀으로 범벅된 얼굴을 들어 너를 바라보면 벌겋게 상기된 네가 씨익 웃으며 나를 바라봤다. 그렇게도 좋은 걸까. 너는 나를 이기면 행복한 걸까. 나는 네가 내 옆에 있지 않아 행복하지 않았다. 인생의 전부라 여긴 야구를 그리고 내 공을 받아낼 포수가 있는 세이도에서 야구를 하고 있음에도 행복하지 않았다. 너란 사람은 나에게 늘 좌절과 사랑의 모순된 감정을 안겨준다. 그것마저도 소중해서 허겁지겁 네 미소와 말들을 주워 내 마음에 담았다. 서릿발처럼 차가웠던 내 안이 너로 덥혀졌다.

끝까지 넌 나를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대하지 않았다. 이기적이라 나를 손가락질해도 좋았다. 감정의 갈무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완투를 못하고 강판당하는 것보다 더 분하고 자존심 상하는 일이 있었다. 바로 너였다. 너만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고 이런 느낌을 느끼게 했다. 사와무라 에이준. 너는 친구라는 틀로 나를 가뒀다. 허울뿐인 친구라는 이름과 라이벌이라는 관계는 네가 나에게 보내는 일방적인 소통의 통로였다. 나는 원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어째서 원하지 않는 관계를 유지하고 있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할 말이 없었다. 그렇게 나마 너에게 네 옆에 있고 싶다는 게 내 처절한 사랑의 말로였다.

내가 살던 곳의 계절처럼 너는 작열하는 태양 아래의 눈발과도 같았다. 세찬 바람이 눈덩이와 섞여 흩뿌려지는 그 혹한의 날씨 속에서도 한줄기 빛이 내리 쬐는 기이한 현상처럼 너는 나에게 신비이자 자연같이 거스를 수 없는 존재였다. 그렇지만 나는, 나는 널 가지고 싶었다. 대자연을 다스리려는 오만한 인류처럼 잡을 수조차 없는 태양과도 같은 너를 내 손아귀에 넣고 싶었다.

그 사람에겐 너무나도 쉬웠지만 나에게는 너무나도 어려웠다. 그는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음에도 네 마음을 얻었지만 나는 네 마음을 얻을 수조차 없었다. 같은 학년의 하루이치나 네 룸메이트인 선배 역시도 네 영역 안에 너무나도 쉬우리만큼 들어갔으나 나는 그러지 못했다. 내가 너와 같은 포지션인 게 문제일까. 내가 사랑하는 야구 때문에 너와 거리가 좁혀지지 않는 걸까. 같은 투수를 하고 있어 기뻐했던 내 철없던 의미부여가 너에게는 부담이고 아니꼬왔던 걸까. 내가 포수였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을까. 너에 대한 생각들은 나를 끊임없이 찔러 내 안에서 너를 빠져나가게 하려고 애썼다. 나는 생각의 상처들에 반창고를 붙이며 너를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너덜너덜해졌지만 네가 빠져나가지 않아 만족했다.

손가락을 공위에 얹었다. 마디와 실밥이 정교한 모양을 이루며 교차했다. 심호흡을 하고 팔을 머리 위로 들었다. 직구. 머릿속 안에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왼발을 올리고 공을 내리 꽂을 찰나 다른 소리가 들렸다.

나이스, 에이준!’

! 봤슴까? 체인지업임다!’

너머의 투구 연습장에서는 기쁨으로 상기된 네 목소리가 들렸다. 폼이 무너졌다. 넌 이렇게도 쉽게 나를 무너지게 만들었다. 내 전부였던 야구마저 너라는 사람으로 덕지덕지 붙여져 원래 어떤 형태였는지 알아 볼 수 없었다. 체인지업을 던진 너에게 축하한다는 말은커녕 함께 웃어주는 것조차 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바로 옆에 있는 연습장이었지만 너와 내 사이는 네 고향인 나가노와 내 고향인 홋카이도보다도 멀었다.

손아귀에 잡혀 있는 던지지 못한 야구공이 울었다. 글러브 안에서 아까와는 다른 방식으로 공을 고쳐 쥐었다. 슬라이더. 와인드업 뒤 그물망에 던져진 공은 말 그대로 클린이었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공을 줍지 않았다. 에이준. 아직까지도 네가 있는 투구 연습장에서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에이준. 에이준, 사와무라 에이준.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갔다. 지금 당장 너에게 가고 싶었다. 나는 글러브를 손에서 빼 바닥으로 던졌다.

 

 

 

 

 

 

2016.0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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