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게스가] 15

pinn_pond 2015. 10. 16. 13:04


15

카게야마 토비오/스가와라 코우시

 

 

 

 

초여름에 비가 왔다. 갑자기 하늘이 우중충해지더니 투두둑 제법 거센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미 일기예보를 듣고 소나기가 내린다는 것을 안 학생들은 하나둘 우산을 펴고 하교를 해서 교내에 남아있는 학생은 몇 되지 않았다. 스가와라도 몇 남지 않는 학생 중 하나였고 지금 그의 앞에 있는 남자 또한 그런 학생 중 한 사람이었다.

창문과 자신 앞에 있는 남자 사이에 껴있는 형태가 되어버린 스가와라는 어색한 침묵에 실내화를 신은 자신의 발끝만 바라보았다. 실내화 앞 코가 약간 지저분했다. 빗방울 소리가 잦아들고 비 냄새가 창문을 타고 들어 왔을 때, 앞에 있던 남자가 스가와라의 손을 잡으면서 이야기 했다.

왜 대답을 안 들려주시는 거예요?”

맡겨놓은 것이라도 있는지 당당하게 대답을 요구하는 그의 태도에 스가와라는 겨우 시선을 들어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눈과 마주했다. 새까맣지만 빛이 나는 그의 눈동자에 스가와라는 마치 블랙홀에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아직 좀 생각이 필요해

힘겹게 입을 떼서 나오는 말은 고작 저 말 뿐이었다. 애매모호한 답. 분명 자신이 똑같은 입장의 상대방이 되었을 때 저런 답을 들었다면 화가 났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스가와라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답은 이것뿐이었다. 그는 스가와라의 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잡은 손에 미약하게 힘을 줬다.

원하는 답이 아니에요.”

토라진 아이처럼 불퉁한 대답이 들렸다. 카게야마가 많이 실망했나. 스가와라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조심스럽게 앞에 있는 남자의 안색을 살폈다. 마주보던 눈은 창 저쪽 끝으로 향하고 있고 입은 약간 나온 것 같이 보였다.

그렇다고 감정을 강요할 순 없잖아. 순간적으로 스가와라가 속에서만 생각하고 있던 말을 입 밖으로 내뱉었다. 창끝에 있던 카게야마의 시선이 다시 스가와라에게 향하고, 묘하게 날카로운 카게야마의 시선 때문에 스가와라는 바짝 긴장했다. 사과해야하나 하는 생각이 들어 말을 하려고 입을 땠을 때, 카게야마가 잡은 손에 힘을 꽉 주며 말했다.

선배는 약았어요.”

처음처럼 당당한, 아까처럼 투정부리는 말투가 아니었다. 지나가는 사람에게 인사를 건네듯이 툭 던진 말이었지만 그 어느 말보다 스가와라의 마음을 후벼 파는 말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으나 이해하기 싫었다.

무...무슨 소리야

선배, 절 좋아해주세요.”

눈 하나 깜빡 안하고 뻔뻔한 소리를 내뱉는다. 처음 카게야마가 고백했을 때는 부활동을 핑계로 대답을 미뤘지만, 오늘은 부활동도 없을뿐더러 교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자신의 손을 잡은 카게야마의 손이 뜨거웠다.

카...카게야마, 우린 남자고...”

상관없다는 거 아시잖아요.”

“...나 이제 3학년이라 졸업도 하고

신경 안 써요.”

스가와라가 무슨 변명을 하던지 카게야마는 상관없다는 말로 그의 변명을 갈무리했다. 사실 스가와라도 카게야마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같은 성별의 남자가 본인의 감정을 이렇게 거칠게 부딪히는 것에 대해 막연한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자신이 처음 느껴보는 생소한 감정과 타인이 주는 또 다른 형태의 감정. 스가와라는 그런 것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몰랐다.

그렇기 때문에 이도저도 아닌 입장을 취했고, 혈기왕성하고 거친 카게야마는 그런 스가와라의 태도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었다. 부활동이 없는 절호의 기회를 틈 타 다시 스가와라에게 물어봤지만 아직까지도 그가 원하는 답을 주지 않았다. 적어도 카게야마가 생각하기에 그리고 스가와라가 그에게 보여준 행동은 어느 정도 호감이 있지 않은 상대에게는 보여주지 못할 행동들이었다.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괜찮아요.”

그리고...난 남자고...”

아까 말하셨잖아요.”

그리고... 또...”

더 이상 카게야마의 마음을 밀어낼 변명이 생각나지 않았다. 힘겹게 머릿속을 뒤지면서 변명해야할 말을 찾고 있을 때, 갑자기 스가와라의 머리 옆으로 카게야마의 오른팔이 지나가 창문을 짚었다. 카게야마에게 갇힌 꼴이 된 스가와라는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카게야마를 올려다봤다.

카...카게야마

되도 않는 소리 하실 거면 그냥 눈감아주세요.”

카게야마는 그렇게 말하고는 본인이 먼저 눈을 감고 그대로 천천히 자신의 얼굴을 스가와라 쪽으로 움직였다. 스가와라는 이런 카게야마의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그는 지금 스가와라에게 입을 맞추려 하고 있었다. 점점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얼굴에 스가와라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카게야마의 얼굴에 스가와라는 자신이 약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대로 눈을 감았다.

약간 거친 입술이 스가와라의 입술 위로 포개지고, 그에게 양해를 구하는 듯 상대편의 남자는 혀로 조심스럽게 스가와라의 입술을 핥았다. 부드럽게 스가와라의 입술을 핥던 혀가 쑥하고 안으로 들어왔다. 카게야마의 뜨거운 혀가 스가와라의 입 안을 탐색했고, 뻣뻣하게 굳어있던 스가와라의 혀를 그대로 감싸 올렸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스가와라는 이대로 자신의 혀가 타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입안을 헤집고 다니는 카게야마의 혀 때문에 심장은 두방망이질 쳤고 다리에는 점점 힘이 풀려가고 있었다.

다시 한 번 스가와라의 혀를 부드럽게 감싸 올리고 쪽 하는 소리와 함께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의 입에서 자신의 입을 뗐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 때문에 서로의 입술이 반질반질 했다. 불볕더위에 나가있는 것처럼 스가와라의 볼이 화끈거리고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스가와라는 자신의 그런 마음에 화들짝 놀랬다.

다시 해도 돼요?”

카게야마가 스가와라에게 눈을 맞추면서 물었다. 그런 카게야마의 말이 들리지 않은 것인지 스가와라는 카게야마를 바라보면서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아무 말 없으면 다시 할게요.”

다시 눈을 감고 천천히 자신에게 다가오는 카게야마의 얼굴을 보면서 스가와라는 생각했다. 이제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해야한다고. 카게야마를 좋아하고 있다는 것을.




정오가 쫌 지났을 무렵, 스가와라는 체육관 뒤뜰의 잔디에 누워서 잠을 자고 있었다. 초여름에 부는 바람은 의외로 시원해서 잠깐만 누어있자고 마음먹은 그를 대략 한시간정도 단잠에 빠지게 만들었다. 어렴풋이 잠이 깼지만 살랑살랑 얼굴 위로 불어오는 바람의 느낌이 좋아서 그는 눈을 감고 꿈과 현실의 중간인 상태를 기분 좋게 느끼고 있었다.

바람 소리만 들리던 뒤뜰에 누군가의 발소리가 저 멀리부터 들렸다. 발소리의 주인은 조심스럽게 걷는지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정도의 소리였지만 스가와라의 귀에는 제법 잘 들렸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자신의 앞에 멈추고, 별안간 누군가 잔디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자신의 뺨에 적당히 서늘한 누군가의 손이 올려졌다.

누군지 궁금해 눈을 뜨고 싶었지만 예상외로 눈꺼풀이 무거웠다. 서늘한 손은 바람에 나부끼는 자신의 머리를 정리해주고는 손가락으로 얼굴을 몇 번 만지더니 다시 뺨에서 멈췄다. 이제는 손의 주인이 누군지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게야마

잠에서 아직 못 헤어 나와 약간 몽롱한 목소리로 손의 주인일 거라 단정 지은 사람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곧바로 대답이 들려왔다.

.”

대답의 주인이 자신이 생각한 사람과 일치하자 스가와라는 기분이 좋은지 그대로 미소를 지었다. 아직도 무거운 눈꺼풀에 힘을 줘서 눈을 뜨자 강렬한 햇빛이 스가와라의 눈을 괴롭혔다. 스가와라가 빛 때문에 인상을 확 찌푸리자 그의 얼굴 위에 카게야마의 얼굴이 쑥 하고 들어와 그림자를 만들어 주었다.

한결 편해진 시아 덕에 스가와라는 눈을 한번 깜빡이고 다시 자세히 카게야마의 얼굴을 바라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카게야마의 눈빛에는 사랑한다는 감정이 보란 듯이 뚝뚝 묻어나왔다. 부끄럽기도 하고 뿌듯하기도 한 감정이 뒤섞인 스가와라는 카게야마에게 환하게 웃어주었다.

어서와.”

좋아해요. 나도. 서로 속삭이듯 달콤한 말이 오가고 카게야마의 얼굴이 스가와라 얼굴 위로 겹쳐졌다.

 

 

 

 

 


2015.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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