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야쿠] 17

pinn_pond 2015. 10. 16. 13:15


17

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봄이라고 날씨가 모두 따듯한 것은 아니었다. 얇은 외투는 필수적으로 걸쳐야 할 정도의 꽃샘추위가 아직까지도 기승을 부렸다. 목이 턱 부근까지 올라오는 져지의 지퍼를 올리면서 하이바 리에프는 운동화를 다시 고쳐 신었다. 탁탁. 운동화 코를 현관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혼자 사는 자취방에 울려 퍼졌다. 아무도 듣지 않을 다녀오겠습니다를 외치고 문손잡이를 돌려 그대로 뛰어 나갔다.

긴 다리를 쭉쭉 뻗으면서 걸음을 더 재촉했다. 운동 특기로 대학교에 진학한 리에프는 가족들이 모두 아버지의 직장을 따라 러시아에 가는 바람에 자취를 하게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어린아이 같은 리에프가 믿음직스럽지 못한지 끝까지 걱정만하시다가 가셨고, 이틀에 한번 꼴로는 꼭 국제전화를 통해 잔소리를 하셨다. 그러나 그런 잔소리도 리에프는 즐거웠다.

원인은 아마 그의 자취방에서 30분 정도 걸어가면 나오는 연인의 집 때문 일 것이다. 고등학교 때부터 쭉 사귀어온 연상이지만 작은 연인. 리에프는 연인을 생각할 때면 가슴이 벅차올라 머리에선 폭죽이 펑펑 터졌다. 아직도 그를 생각하면 가슴이 떨렸다. 처음 고백할 때를 생각하면 아직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만 같았다.

헤헤헤. 다시 생각난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는지 리에프가 달리다가 갑자기 서서 머리를 긁적이면서 웃었다. 어서 가서 만나고 싶다. 손을 들어 주먹을 한번 꽉 쥐고 리에프는 다시 뛰었다.

야쿠상! 야쿠상!”

리에프는 초인종을 대여섯 번 누르더니 급한 마음에 현관문을 쾅쾅 쳤다. 분명 야쿠에게 욕을 먹을 것이지만 빨리 연인을 보고 싶은 생각이 더 먼저였다.

멍청아 치지 말랬...”

현관문 사이로 빼꼼 나온 옅은 모래색 머리를 보자마자 리에프는 어깨를 잡아 제 쪽으로 끌어안았다. 허리를 깊이 숙여야 연인의 채취를 느낄 수 있었지만 리에프는 개의치 않고 야쿠를 살짝 들어올렸다. 야쿠에게서 나는 비누냄새도 좋았고 그의 옷에서 나는 정갈한 섬유유연제의 냄새 또한 리에프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놔줘 리에프 숨 막혀.”

옛날에는 리에프의 이런 스킨십에 당황하고 또 부끄러워서 무작정 밀어내고 때렸지만, 이것이 제 덩치 큰 연하의 연인이 보여줄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제는 살짝 리에프의 어깨를 톡톡 치는 걸로 그의 의사표현을 했다. 그리고 리에프 또한 그런 야쿠의 배려를 이제는 감사하게 받아들였다.

보고 싶었어요!”

어제도 봤는데 뭘.”

에이참 야쿠상!”

보고 또 봐도 보고 싶어요. 낯간지러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뱉는 리에프를 보며 야쿠는 약간 쑥스러운 마음에 몸을 돌려서 현관문을 닫고 문을 잠궜다. 리에프가 갑자기 껴안는 바람에 흐트러진 베이지색 가디건을 여미면서 이번에는 야쿠가 먼저 리에프의 손을 잡아 끌었다.

빨리 가자. 영화 시작하겠어.”




영화를 보고 카페에서 달달한 바닐라라떼까지 마신 리에프는 완벽한 데이트에 매우 만족감을 느끼고 있어서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야쿠는 그런 리에프를 한 번 바라보고는 조별과제 때문에 대학 동기에게서 온 라인 메시지에 대해 답장을 했다. 데이트에 방해받는 느낌에 계속 답장하지 않고 미뤄왔지만 다섯 통의 재촉 메시지에 어쩔 수 없이 답을 했다.

답장을 보내고 핸드폰을 가디건 주머니에 찔러 넣은 야쿠는 아직까지도 흥얼거리는 리에프를 잠깐 바라보다가 자유로워진 왼손을 리에프의 오른손에 겹쳤다. 희고 약간 차가운 리에프의 손을 야쿠가 잡자 흥얼거리던 리에프의 허밍이 멈췄다. 야쿠는 고개를 들어 리에프를 바라보니 초록색 눈으로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왜...”

가끔씩 리에프가 자신을 이렇게 바라볼 때마다 좋으면서도 빤한 시선 때문에 가슴이 간질간질 거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초록색 눈은 한참 야쿠를 바라보다가 이내 고운 선을 그리면서 웃었다.

야쿠상. 좋아해요! 많이많이!”

그렇게 말하고는 맞잡은 손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이 꽉 잡았다. 가로등만 잔잔하게 비추고 있는 골목길은 두 사람이 걷는 발자국 소리밖에 들리지 않았다. 리에프 한 걸음에 야쿠 두 걸음. 리에프가 보폭을 맞춰 느리게 걸어도 무의식적으로 걷는 걸음걸이 때문에 야쿠가 약간 빨리 걸었다. 그래도 둘이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아 벌써 벚나무집이에요.”

갈색 지붕 주택의 담장 너머로 길게 뻗은 벚나무 가지에는 벚꽃들이 몽우리가 져있었다. 이 집에서 한 블록만 더 가면 야쿠의 집이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리에프는 금세 시무룩해져서 입이 삐죽 나와 있었다.

다음에 또 만나면 되지.”

내일은 안되신다면서여!”

. 내일은 조별 모임 있어서 안 돼.”

그니까여!!! 기다리다가 죽을꺼에여!!!”

삐죽삐죽 거리면서 되도 않는 생떼를 쓰는 리에프의 입을 야쿠는 그대로 잡아 당겼다.

아아아!! 아흐파여 야크상!!”

입만 살았지 아주.”

두 번 정도 쭉쭉 잡아당기다가 놔주었다. 얼얼한 건지 리에프는 바로 손을 가져다 대서 문질렀다.

너무해여 야쿠상!!”

모르겠는데

씨...”

어쭈, ?”

치료해주세여!!!!!!!”

그렇게 말하고는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눈을 감고 허리를 숙인 뒤 잡아당겨서 약간 붉어져 있는 입술을 야쿠에게 쭉 내밀었다. 순간적으로 다가오는 리에프의 얼굴 때문에 당황한 야쿠는 제 눈앞에 보이는 리에프의 입술이 징그러워 보이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어서 꽤 오래 기다렸을 법 한데 리에프는 아직도 눈을 감고 야쿠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쩔까나 생각한 야쿠는 그대로 리에프에게 입을 맞췄다.

. 싹 나은 거 같아여

바보네.”

그럼 다시 한 번 더!”

리에프의 입술이 다가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던 야쿠는 누군가의 음성에 화들짝 놀래 그대로 리에프를 밀쳤다.

모리스케

목소리의 주인은 야쿠의 어머니였다.




그 뒤로 리에프와 야쿠는 일주일하고도 이틀을 만나지 못했다. 남자끼리 사귄다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는 사회이기 때문에 소중한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다. 언젠가는 말해야 한다 생각했지만 저번과 같은 상황에서 알리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 일주일간 야쿠는 부모님을 설득했다.

애당초 야쿠에게 부모님에게 변명해야한다는 생각은 자리 잡고 있지 않았다. 몸집과는 다르게 자존감이 높고 자신의 주관에 대해 흔들리지 않는 품성을 지닌 야쿠는 동성 간의 사랑이 사회에서 받아들여지지 않는 뿐 잘못 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 생각은 리에프를 연인으로 받아들이기 전에도 지니고 있던 생각이었다.

그러나 일주일 간 부모님을 설득하려는 야쿠의 행동은 철저하게 무시당했다. 그의 부모님은 야쿠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보수적이셔서 야쿠의 말을 들으려 하지도 않았다. 대학생인 야쿠를 밖에 나가지 못하게 했으며, 집으로 찾아온 리에프가 문을 두들기거나 초인종을 누르며 이야기를 해도 무시했다.

부모님을 설득한지 일주일이 지났을 때, 야쿠는 문득 자신이 정말로 잘못된 길을 걷고 있는 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그리고 다음날 리에프가 보낸 메시지를 받고 그는 자신이 리에프의 사랑을 의심했음에 대해 눈물을 흘렸다.

야쿠상. 무슨 일이 있어도 좋아해요. 사랑해요.’

어떤 미사여구도 붙여지지 않았지만 리에프가 할 수 있는 한도 내의 모든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야쿠에게 보냈다. 그의 마음이 전해지자 의심을 한 자신이 초라하고 리에프의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어 보였다. 야쿠는 그렇게 이틀을 내리 울었다.




야쿠의 부모님은 야쿠가 혼자 집에 있는 것을 달갑지 않아 했지만, 그들이 진행하고 있는 사업 때문에 삼일 정도 집을 비워야 했다. 리에프와의 관계에 대해 무시하던 그들은 아침에 짐을 꾸려 집을 나서면서 정리해. 한 마디만 던지고 나갔다. 무엇을 정리하라는 지 말을 하지 않았지만 야쿠는 알 수 있었다. 그의 부모님은 리에프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 때로부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쿠의 집을 두들기던 리에프는 자신의 눈을 믿을 수 가 없었다. 야쿠의 집 현관문 앞에 야쿠가 기대고 서 있었다. 사이즈가 큰 듯한 티셔츠를 입은 야쿠는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보다 야위어 있었다. 리에프는 한걸음에 달려가 오늘따라 더 작아보이는 야쿠의 몸을 안았다. 야쿠의 향기를 맡으니 죽어가던 육신에 생명이 불어넣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리에프의 어깨에 얼굴을 부비면서 야쿠가 맞장구를 쳤다. 벌써부터 눈물이 차올랐지만 야쿠는 주먹을 꽉 쥐어 참았다. 지금은 리에프의 사랑을 더 느끼고 싶었다. 아직까지는 응석쟁이일 뿐이었다.

감동적인 상봉의 재회가 이루어지고 그저 둘이 얼굴만 반히 바라봤다. 야쿠가 바라보기에 리에프는 그 사이에 더 큰 것 같았다. 언제나 단정하던 입 주변에 수염으로 거뭇거뭇 했고, 목소리는 약간 갈라져있었다. 리에프의 뺨을 만지면서 야쿠는 약해지는 마음을 다시 고쳐 잡았다.

야쿠상. 이젠 괜찮...”

할 말 있어. 리에프.”

?”

이미 할 말은 머릿속에 다 그려 놓았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아름답고 행복했던 너와 나의 시간을 어떻게 해야 정리할 수 있을까.

헤어지자.”

“...?”

일단 가장 중요한 말을 내뱉으니 그 뒤는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모래처럼 쉽게 나왔다.

생각하고 생각해봤는데 헤어지는 게 최선인 것 같아.”

“...부모님한테 들켜서 헤어지자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헤어졌다고 사귀는 거 아니라고 거짓말하지 그랬어요.”

거짓이라도 너와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어.”

야쿠상과 헤어지는 것이 제 자신을 부정하는 것인데요.”

평소엔 어려운 말을 구사하지 못하는 리에프가 야쿠의 말에 따박따박 대답했다. 야쿠는 자신과 헤어짐을 믿고 싶어 하지 않는 리에프를 보면서 더욱 슬퍼졌다.

사귀지 않으면서 너를 인정할 수 있데. 그런데 난 나와 사귀는 너를 부정할 순 없어.”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가요.”

자신도 자신이 내뱉은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데 듣는 상대방은 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야쿠는 리에프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싫었다.

거짓은 언제나 들통이나. 이번처럼. 난 다른 사람 앞에서 너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싶지 않아.”

어려운 말들이 여과가 되지 않고 야쿠의 입 밖으로 거칠게 내뱉어 졌다. 결국 리에프의 큰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까부터 눈물을 참고 있었는지 이미 눈가는 시뻘게져 있었다.

그런데 왜 헤어지자고 해요

너를 인정하게 하려고.”

“...모르겠어요.”

손을 들어 거칠게 눈가를 벅벅 닦으면서 리에프가 말했다. 리에프의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야쿠의 심장을 아프게 때렸다.

진짜 모르겠단 말이에요...”

아무 말이 없는 야쿠에게 리에프가 다시 말했다. 이제는 눈물을 닦지 않는 지 리에프의 볼은 이미 젖어 있었다. 야쿠는 닦아주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차마 손이 떨어지지 않았다.

사랑해. 리에프. 그러니깐 헤어지자. 이제 다시 찾아오지 마.”

지금 뱉는 말이 자신의 목구멍에서 나오는 말인가 싶을 정도로 생경한 말들이 쏟아졌다. 야쿠는 자신의 옷자락을 잡는 리에프의 손을 거칠게 떼어내고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 집 안으로 들어와 그대로 주저앉았다. 몸을 둥글게 말자 그때서야 참아왔던 눈물이 쏟아졌다. 꺽꺽거리면서 우는 야쿠는 자신의 울음 소리를 리에프가 들을 까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거짓말 마요!! 야쿠상!!”

현관문 밖에서 리에프가 거의 울부짖으면서 문을 두드렸다. 다급하게 자신의 이름을 부르면서 제가 다 잘못했다고 하는 리에프의 목소리는 절규에 가까웠다. 야쿠는 몸을 돌려 현관문에 뺨을 댔다. 현관문을 두드리는 리에프를 이렇게라도 느끼고 싶어서였다. 끝내 나오지 않는 말들을 그저 마음속으로만 되뇌면서 야쿠는 그렇게 울었다.

 

 

 

 

 


2015.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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