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18

pinn_pond 2015. 10. 16. 13:19


18

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내가 너와 처음 만난 것은 생각이라는 것이 싹틀 무렵. 옆집에 산다는 이유로 어머니들끼리 서로 친해져 너라는 사람을 소개받았을 때, 나는 한 살 형이라는 말에 이끌려 너에게 먼저 손을 내밀었다. 한참을 잡지 않는 너를 보고 멋쩍은 느낌이 들어 손을 빼려했을 때, 약간 떨리고 있지만 말랑하고 따듯한 손으로 너는 내 손을 잡아주었다.

쿠로오 테츠로야. 테츠라고 불러도 돼!”

..?”

편한 데로 불러

앞니가 빠진 채 개구지게 웃어 보이는 나에게 너는 얼굴을 들어 봄의 햇살처럼 따듯하게 웃어주었다. 그때부터 난 무엇이든지 너와 함께하려고 했다. 우연히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배구부 교실에 들어가 배구에 대한 매력을 알게 되고, 나는 내가 느낀 그 감정을 너도 함께 공유하기를 원했다. 싫어하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어느새 즐겁게 배구를 하는 너를 보고 함께하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같은 초등학교, 같은 중학교, 같은 고등학교. 너는 언제나 나와 함께였고 그것이 이상하다는 것을 못 느낄 정도로 당연한 것이었다. 같이 등교하고 같이 하교하고, 서로의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같이 밥을 먹는. 특별한 일이 없어도 특별히 할 말이 없어도 같이 있는 것에 어색하지 않고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그런 소꿉친구가 너와 나의 관계였다.

사람은 각기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고 여겼지만, 너와 나는 언제나 함께였기에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다고 짐작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을 먼저 한 것도 나였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 것도 나였다. 너에 대해 특별한 감정을 품고 있다는 것을 겨우 깨달은 것은 중학교 2학년 때 체육대회가 끝나고 너와 함께 하교하던 그날이었다.

평소와 다름없는 하지만 나에게는 특별한 날이었다. 돌고 돌아 겨우 너에 대한 감정을 인정한 날이었으니깐. 네가 평소와 다른 것을 전혀 하지 않았지만 너의 집 앞에서 나에게 잘가라고 인사하는 너를 보고 나는 너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멀어져가는 너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마음속으로만 좋아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는 나를 처음으로 미워했다.

너는 소심하고 겁쟁이어서 내가 여태껏 해왔던 것과 다른 의미로 너에게 다가가면 분명히 도망갈 것이라 생각했다. 너를 잃는 것은 너에게 미움 받는 것보다 더 싫었다. 하지만 너는 나를 미워할 수 없었다. 난 유일하게 네가 인정해준 너의 친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나의 족쇄가 되어 나를 옭아 멜지라도 그때는 그것이 좋았다. 나는 너를 사랑했기에 네가 나에게 주는 모든 것 또한 사랑했다.




너에 대한 사랑은 변함이 없었다. 너와 함께 배구를 하면서 다른 이들이 모르는 둘만의 필살기나 유대감으로 나는 너에 대한 우월감을 느꼈다. 그러나 거기까지가 나의 한계였다. 코즈메 켄마의 소꿉친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너를 잃지 않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감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내 자만심이라는 것을 사소한 계기로 알아버렸다.

야쿠상, 뽀뽀해도 돼요?”

바보야 여기서..

같은 배구부원인 리에프와 야쿠가 사귀는 사이라는 것을 아주 우연하게 알게 되었다. 그들은 들킨 게 나인 것이 다행이라는 말투로 서로 교재한지 두 달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리에프는 사랑스럽다는 듯이 야쿠를 바라봤고, 야쿠는 부끄러워했지만 그도 싫지 않은지 리에프가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너희들 남자끼리 사귀는 데 되게 자연스럽다.”

? 주장 저희 자연스럽나요? 헤헤

바보야 웃지 마.”

서로 장난치고 웃는 모습이 영락없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남자끼리 사귄다는 것이 위화감이 들지 않을 정도로 그들은 편안해 보였고, 나는 거기서부터 나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내가 그들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없었다. 다른 점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햇빛을 손으로 가리려고 애써도 가려지지 않는 것처럼 이미 알고 있는 답에 대해 못 본 척 했다.

한 번 고개를 내민 의구심은 좀처럼 수그러들 생각을 하지 않았다. 정말로 족쇄가 되어 나를 옭아 메기 시작했다. 매일 하염없이 생각했다. 너와 소꿉친구가 아닌 타인으로 만났다면 달랐을까. 이 감정을 너에게 전할 수 있었을 까.

너와 소꿉친구였기에 친해지게 되었다는 단순한 계기도 잊어버린 채, 알고 싶지 않은 이유에 원망만 내뱉었다. 내가 너에게 있어 타인이었다면 나는 너를 알지 못했을 것이고 너를 향한 이 마음도 애초부터 없던 것이 되었을 것이다. 너를 만나게 되는 원인에 감사하면서도 너를 만나게 되는 원인에 대해 한없이 저주를 한다. 사랑한다. 너를 사랑한다. 말할 수 없는 말들을 홀로 되새겨 본다.

쿠로는 애플파이 안 먹어?”

니가 먹는 것만 봐도 배가 불러. 어서 먹어.”

애플파이를 좋아하는 너를 보면 그때가 생각난다. 손님이 선물해 준 애플파이를 몰래 집에서 가지고 나와, 너의 방에서 나눠 먹었을 때 네 표정은 마치 세상을 다 가진 것처럼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애플파이를 사다 줄 때면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표정을 지으며 웃는 너를 보면서 나는 너를 사랑할 수밖에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게임기만 바라보는 너의 옆모습을 바라볼 때면 주체하지 못하는 나의 마음이 나올까봐 두려울 때가 있다.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일까. 나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울컥거리는 마음이 진정되지 않고 세찬 바람이 부는 바다처럼 일렁였다. 너의 마음은 바다와도 같아서 내가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이다. 나에게 한없이 차갑게 다가오지만 나의 모든 근원이 되는 너.

그럼. 먼저 들어갈게. 쿠로,. 잘 가.”

오늘은 나에게 인사하는 너를 끝까지 바라보지 못하고 고개를 숙여버렸다. 더 이상 너를 바라보게 되면 내안에 자리 잡고 있는 너를 향한 끝없는 탐욕이 무섭게 튀어나와 너와 내 사이를 갈라버릴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자 나는 도망치듯이 나의 집으로 뛰어 들어가 그대로 숨죽여 울었다. 너에 대한 나의 마음은.

 



유독 슬픈 날이 있다. 그리고 유독 기쁜 날이 있다. 너에 대해 생각하거나 네가 했던 말들을 상기하거나 너의 흔적을 발견했을 때. 모두 너에 대한 일들이다. 너는 알 수 없지만 너의 많은 부분들은 나의 더 많은 부분들에 대해 마치 꼭두각시 조종사처럼 나를 이리저리 움직이게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가 너를 휘두른다 생각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에게 휩쓸리고 있다.

창 밖에는 비가 오고 사이사이에 잔잔히 바람이 불었다. 비가 오는 날에는 네가 생각났다. 또 화창한 날에도 네가 생각이 났다. 너는 나에게. 특별한 일 없이 너를 볼 수 있는 것은 소꿉친구의 특권이었지만 오늘은 그저 너에 대해 생각하고 싶었다.

창문 앞에 앉아서 너를 그려봤다. 바로 옆에 있지만 잡을 수 없는 너. 마치 너의 집과 나의 집 사이의 거리 같아서 마음이 애석해졌다. 너는 이슬비와 같아서 내가 알아채기도 전에 나의 전부를 적셔갔다. 그렇게 너는 나에게 스며들어왔다. 밀어낼 수도 없게 너는 나의 일부가 되어갔다.

때로는 원망할 때도 있었다. 아직 머리가 덜 컸을 때, 나의 성숙하지 못한 감정들이 너에게로 집약되어 사랑받지 못한 악에 받친 감정들이 너를 원망해 폭발하기 일보직전이었다. 감정을 없애고 싶었고 이렇게 나를 만든 너를 비난하고 싶었지만 너의 얼굴을 본 순간 나는 너에게 종속되었다. 너는 나의 모든.

생각이 생각을 물고 늘어지고 너에 대한 나의 감정들이 내가 만들어낸 너를 물고 늘어졌을 때, 무심코 너의 인사를 받아주지 못하고 나만을 생각했던 어제가 생각나 어느새 나를 자책하고 있었다. 너를 만나고 싶은 감정. 너를 사랑하고 싶은 감정. 너에게 말하지 못하는 미련. 모든 것이 날카로운 창으로 바뀌어 나를 찔렀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너에 대한 감정이기에 난 견뎌냈다.

너를 사랑해. 켄마.”

마음속에 조각조각 퍼져있던 감정들이 불현 듯 하나로 합쳐져 비로소 하나의 문장이 되어 입 밖으로 내뱉어 졌을 때, 십여 년이 넘게 눌러 담아온 너에 대한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쏟아져 나왔다. 문득 얼굴을 만졌을 때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동안 억눌러왔던 감정들이 눈물로써 참회하듯 뚝뚝 흘러내렸다.

혼자 숨죽여 울고 있을 때 창 밖에서 불어오는 비 냄새 섞인 바람이 슬그머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바람에게 위로받는 느낌이 들어 눈물을 더욱 주체할 수 없게 되었다. 아니 주체할 수 없는 것이 눈물인지 너에 대한 사랑인지 알 수가 없었다.

“..쿠로 있어?”

슬그머니 들어 온 것은 바람뿐만이 아니었다. 나의 모든. 너는 그렇게 다시 나에게 다가와 나를 흔들어 놨다. 너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서 얼굴을 들지 않았지만, 비바람을 타고 나에게 전해지는 너의 체향에 나는 보답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한 원망이 다시 터져 나왔다. 너를 원망하고 싶진 않았지만 나는 실로 이기적여 사랑하는 너에게 원망이라는 일차원적인 감정을 전가했다.

너는 이런 나를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팔에 얼굴을 묻고 있어서 네가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떤 자세를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저 너와 내가 한 공간에 있다는 사실이 나에겐 크나큰 위로가 되었다. 원망과 위로. 너는 나에게 사탄이면서도 성자였다. 너는 나에게 야누스 같은 존재이자 단 하나의 사람이었다.

눈물이 점점 말라갈 때 쯤 고개를 들어 너를 바라보려 했지만 나는 할 수가 없었다. 갑자기 내 옆에 무엇인가 앉는 소리가 들리더니 이내 나에게 누군가 기댔다. 너였다. 너만이 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너의 체향과 너의 감촉. 너는 나를 만지지 않았지만 너는 나를 어루만졌다. 아주 교활하고 잔인한 방법으로 너는 나를 위로했다. 그리고 나는 받아들였다.

너의 위로에 나는 다시 울고 말았다. 묻지 않는 너에게 감사하면서도 묻지 않는 너에게 원망이 든다. 이 감정을 말하고 싶으면서도 말하지 않았다. 나의 사랑. 전하지 못하고 보답 받지 못한 구겨져버린 나의 사랑은 그래도 너를 사랑한다고 몸서리치도록 외치고 있었다. 구겨진 너를 향한 나의 마음은 한결같았다.

사랑해. 너를. 한데 모아져서 입 밖으로 내뱉어졌던 하나의 문장이 다시 갈기갈기 찢겨져 감정이란 조각으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사랑해. 사랑해. 뱉을 수 없는 말의 조각들이 내 옆에 기대고 있는 너를 향해 기어가고 있었다. 닿을 수 없을 거야. 그래. 소꿉친구라는 벽은 견고해서 나의 감정들은 너에게 다가갈 수 없다.

 

너와 처음 만났을 때로 돌아가면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보답 받지 못하는 감정에 아파하지도 너를 사랑하는 기쁨을 알지 못한 때로 돌아가면 너와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아니. 나는 달라질 수 있을까.

 

 

그러나 나는 처음부터 너를. 사랑해.

 

 

 

 

 

2015.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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