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이이와] 35

pinn_pond 2016. 1. 4. 00:00


35

오이카와 토오루/이와이즈미 하지메

 

 

 

 

오이카와 토오루는 인기가 많았다. 이맘때 쯤 나이의 여자아이들에게 키가 크고 준수한 외모에 운동을 잘하는 남자아이는 소녀들의 우상이 되기 마련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오이카와는 여자아이들의 인기를 한 몸에 받기 충분한 사람이었다. 그가 대회에 나가는 날이면 그를 응원하는 여자아이들로 대회장이 가득 찼을 정도니 그 누구도 오이카와의 인기를 의심하는 사람이 없었다. 유려한 화술 또한 그의 또 다른 매력이었다. 화려한 언변으로 사람을 대할 때마다 여자들은 상냥해, 친절해, 멋있어 따위를 추임새로 삼아 오이카와와 이야기를 이어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그를 둘러싸고 그를 칭찬해도 오이카와는 스스로가 어디 한 석이 비어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비틀린 사람이었고 공허하다고 여겼다. 마르지 않는 갈증이 늘 그를 따라다녔다. 배구는, 그래서 배구는 그에게 물 한 방울이 되었다. 해갈할 수도 목을 축일 수도 없는 그저 한 방울의 물. 없는 것보단 나았지만 단 한 방울의 물은 더 많은 물에 대한 갈구를 낳는 초석이 되었다. 주변에 사람들이 떠나고 그 홀로 체육관에 남아 연습할 때 그는 눈빛부터 달라졌다. 끝을 알 수 없는 텅 빈 눈으로 배구공을 응시하다가 이내 살짝 스미는 빛으로 힘입어 서브를 넣었다. 손가락 마디를 타고 흘러들어오는 전율로 그는 갈증을 삼켜본다.

아직도 연습 중이야?”

익숙한 향기와 함께 밀려들어 온 음성은 오이카와에게 물이 끼얹은 느낌을 주었다.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가지 못한 물은 아깝게 바닥으로 뚝뚝 흘러내려 갔다.

왔어, 이와쨩?”

단발머리를 한 여자아이를 내려다보면서 멋쩍게 대답했다. 무릎까지 오는 교복 치마하며 제대로 넣지 않아 삐죽삐죽 나온 블라우스, 뻗칠 대로 뻗친 머리는 그녀가 얼마만큼 활달한 성격인지 보여줬다. 그녀의 이름은 이와이즈미 하지메. 오이카와와는 소꿉친구로 어렸을 때 배구부에서 만나 인연을 이어갔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들의 어머니들은 서로 중학교 동창이었다. 그래서 둘은 서로에게 익숙했다. 익숙함이란 편할 때가 많았으나 이성 사이에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편함이 늘어날 뿐이었다. 운이 좋게도 오이카와와 이와이즈미 사이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남매와도 같이 자란 그들 사이에 익숙함과 편안함이 존재할 뿐 그 어느 것도 비집고 들어오지 못했다.

늦었어. 빨리 집에 가자.”

나 기다려준 거야? 못생긴 이와쨩 보기보다는 상냥한데?”

? 보기보다? 먼저 간다.”

, 너무해. 최대한 우는 표정을 지으면서 옆에 널브러져 있던 가방을 들고 체육관을 나가는 여자아이의 뒤꽁무니를 급하게 따라갔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가는 그녀의 뒷모습에 매정하다 외쳤지만, 한편으로는 그녀다운 모습이 그날따라 마음에 들어 슬며시 웃었다. 연보랏빛 블라우스에 감싼 그녀의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오이카와는 그녀의 몸과 팔 사이에 자신의 팔을 넣어 팔짱을 꼈다.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잡힌 팔의 손을 치마 주머니 속에 넣었다.

무릎 아픈 건 좀 괜찮아?”

아니, 오이카와상 너무너무 아파서 숨도 못 쉬겠어요.”

다 나았네.”

교복 바지로 가려진 무릎을 바라보면서 이와이즈미가 묻자 기다렸다는 듯이 응석을 부렸다. 일전에 오이카와가 연습 중 플라잉 동작을 하다가 팔에 힘이 풀려 딱딱한 체육관 바닥에 서포터도 하지 않은 무릎이 세게 닿아 부상당했었다. 일주일 정도 연습을 쉬고 재활치료를 받아야 한다는 진단이 내려지자 그는 모두의 걱정을 한 몸에 받았다. 물론 이와이즈미의 걱정도 받았다. 배구부 매니저와 소꿉친구의 걱정. 같은 사람이 보내는 그러나 각기 다른 시선을 받으면서 오이카와는 이 정도 부상에 대한 보상치고는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웃음이 비집고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눌렀다.

늦은 시간까지 연습할 때마다 이와이즈미가 기다려줬다. 특별한 일이 있지 않은 이상 그 둘은 함께 집에 갔다. 그들에게는 너무나도 익숙한 일이어서 그냥 일상생활의 하나로 자리 잡았을 뿐 크게 의식하지 않았다. 어둑어둑한 골목에 남녀 둘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럼 먼저 들어갈게.”

잘 가, 이와쨩

집에 들어가서 아이싱 하는 거 잊지 말고 오늘 영상 보지 말고 일찍 자.”

이와쨩은 우리 엄마예요?”

. 결국 한 대 맞았다. 매를 벌지. 맞은 부위가 아픈지 머리를 감싸고 불쌍한 표정을 짓는 오이카와를 바라보면서 이와이즈미가 한소리를 더했다. 몸을 팩 돌려 집으로 들어가는 이와이즈미를 보면서 현관문이 닫힐 때까지 오이카와는 실없이 손을 흔들어 주었다. 그녀의 집에서 나오던 불빛이 사라지고 오이카와 역시 자신의 집으로 들어갔다. 현관문이 닫혔다.

 



나왔어.”

잘 갔다왔느냐고 되묻는 어머니의 말씀에 건성으로 대답하고 오이카와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가방을 내려놓고 운동으로 찝찝했던 몸을 물로 씻어냈다. 한결 가벼워진 기분으로 침대 위에 앉은 오이카와는 반바지 아래로 보이는 자신의 무릎을 바라봤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했지만, 점프 플로터 서브 같은 격렬한 움직임이 있을 때는 살짝 통증이 있었다. 아이싱 하라는 이와이즈미의 말이 떠올랐다. 오이카와는 팔을 뻗어 침대 옆 서랍 속에서 무엇인가를 꺼냈다.

약간 앳된 두 아이가 손을 마주 잡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뒤에는 만개한 벚꽃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었고 두 아이는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가슴에 꽃을 달고 함박웃음을 짓고 있었다. 오이카와는 액자 안에 갇힌 사진을 쭉 바라보면서 몸을 천천히 침대 위로 눕혔다. 손을 쭉 뻗어서 바라보는 사진에는 여전히 자신과 그녀가 웃고 있었다. 중학교 입학식 때였을 것이다. 그때는 자르지 않은 긴 생머리의 그녀를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갈증이 더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메

오이카와는 그녀의 이름을 자신의 입안에서 굴려봤다. 그리고는 그것을 삼켜 목구멍으로 들이밀자 그의 몸은 마치 오아시스를 발견해 손으로 첫 물을 떠 마신 사람마냥 육신에 생기가 불어넣어 졌다. 텅 비었던 오이카와의 눈이 오롯이 그녀의 사진으로 채워졌다. 단 세 글자가 소리를 입어 밖으로 나와 공기 중에 흩어지자 비가 내리듯 오이카와의 전신을 적셨다. 사랑스럽게 웃고 있는 사진 속의 그녀는 그에게 유일한 존재였다.

운이 나쁘게도 오이카와는 그녀와의 사이가 불편했다. 남매와도 같이 자란 그들 사이에는 익숙함과 불편함 사이에 비집고 들어올 수 있는 요소를 오이카와 자신이 만들어냈다. 그녀에게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는 그녀가 사랑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 갈증은 점점 심해져 오이카와는 그녀가 보이지 않으면 초조해졌다. 많은 여자 사이에 둘러싸여 재미난 이야기를 나눠도 그는 그녀를 떠올리며 그녀를 찾았다. 봄에 내리는 이슬비처럼 그녀는 화려한 맛이 없었지만 조용하고도 촉촉하게 오이카와를 적셔나갔다. 오이카와는 그녀를 가지고 싶었다. 하지메를. 이와이즈미 하지메를.

배구는 그에게 안식처가 되어주었다. 배구를 할 때면 그녀를 향한 생각도 끝없는 갈증도 서서히 잊혀갔다. 재밌었다. 오이카와는 배구를 그렇게 정의 내렸다. 전략을 짜서 상대편을 몰락시키는 것도 좋았고 팀원들과 호흡을 맞추는 것도 즐거웠다. 그녀가 보고 싶어 목이 탈 때마다 오이카와는 배구라는 물방울을 조금씩 맛보았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못한다는 듯이 오이카와의 배구마저 본인의 손에 움켜쥐었다. 이와이즈미는 아오바죠사이 배구부의 매니저가 되었다. 더는 오이카와에게 그녀가 없는 곳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늘 보았던 그녀의 모습을 다시 상기했다.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무릎을 바라보던 얼굴과 더러운 체육복을 갈아입느니라 정전기가 일어나 뻗친 머리카락, 리본을 채 차지 못한 연보랏빛 블라우스와 주름이 구깃구깃 져 있는 다른 여자아이들보다 긴 교복 치마. 모든 것이 그녀를 이루어 그녀를 그녀답게 해주었다. 자신에게 말하던 그녀의 새빨간 입술과 반짝이는 눈을 덮은 짙은 속눈썹, 짧은 머리칼 뒤로 보이는 목덜미와 팔짱을 꼈을 때 얇은 블라우스 위로 느껴지던 가슴. 오이카와는 인상을 찌푸리며 순간 스미는 욕정을 이겨내 보려 했다. 매일 이런 반복이었다.

그녀에게 지껄이는 말 중 못생겼다는 말 또한 진심이 아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역설적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녀에게 못생겼다고 하는 말은 오이카와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다. 추잡한 내면을 가진 본인에게 하는 말로 그녀를 바라볼 때마다 틈을 노려 비집고 나오려는 욕망을 일컫는 것이었다. 오이카와는 제 악취 나는 내면에 신경질이 치밀어 올라 그는 손에 들고 있던 액자를 던지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했다. 그는 액자를 들어 그녀를 다시 한 번 눈에 담고는 서랍에 소중하게 넣어 뒀다. 오이카와는 그렇게 눈을 감았다.

 



오늘 자고 갈래요!”

그래, 하지메 방에서 잘 거지?”

!”

하지메, 토오루 베개 들고 가라.”

꿈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초등학교 때 이후로는 그는 그녀를 그리고 그녀는 그를,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와이즈미 씨에게 받은 베개를 들고 서로 키득거리면서 2층으로 올라가는 꼴을 보아하니 그날임이 분명했다. 오이카와에게는 잊을 수 없었고 잊은 적이 없는 그날이었다. 아직은 어린아이 티를 벗지 못한 소년과 소녀는 오누이같이 다정해 보였다. 소녀는 긴 머리를 빨간 리본으로 느슨하게 묶고 있었고 소년의 밤갈색 고수머리는 소녀보다 한 뼘 높은 위치에 있었다.

소녀의 약간 큰 침대 위에 어머니가 준 베개를 놓고 소년과 소녀는 함께 누었다. 깜깜한 소녀의 방에는 침대 옆 탁자에 놓인 병아리 등만 은은한 노란 불빛을 방에 비추고 있었다. 두 아이의 어머니가 귀엽겠다며 사서 입힌 조그만 공룡이 그려져 있는 잠옷은 소녀에겐 초록색이었고 소년에겐 노란색이었다. 아이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지 머리를 맞대고 재잘거렸다.

그 개구리가 나츠쨩 치마 위에 뛰어서 나츠쨩이 울어버렸다니깐?”

~ 그거 내가 놓은 거야

하지메쨩이? 대단해

어린 오이카와는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우면서 앞의 여자아이를 보고 웃었다. 비밀을 공유한 여자아이도 그의 웃음에 따라 조그맣게 쿡쿡거리면서 그에게 속닥거렸다.

저번에 나츠가 토오루 괴롭혔잖아

멋져, 하지메쨩!”

그래도 오늘 우리 중학교에 입학했으니깐 이런 장난은 그만해야겠지?”

조금은 해도 되지 않을까?”

그렇지? 말하면서 이와이즈미는 다시 웃었다. 오늘은 두 아이가 키타가와 제1중학교에 입학한 날이었다. 입학식에서 둘은 가슴에 꽃을 달고 환하게 웃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처음 입어보는 교복과 처음 보는 중학교 풍경에 아이들은 어색했지만 서로가 서로의 옆에 있다는 걸 확인하고는 다시 제 또래들처럼 설렘과 즐거움으로 입학식을 즐겼다. 입학식을 마치고 부모님들과 맛있는 것을 먹고 놀이터에서 마지막으로 초등학교 때 친구들과 놀다가 오이카와는 제집으로 가지 않고 이와이즈미의 집으로 왔다.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와 오래도록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은 그 나잇대라면 당연한 일이었다.

얘들아, 늦었어. 어서 자라.”

방에서 속닥거리던 아이들의 목소리를 들은 이와이즈미씨가 밖에서 소리쳤다. 어른의 목소리를 들은 아이들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리더니 서로를 마주 보고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같은 동작을 했다는 것이 매우 마음에 들어 아이들은 다시 서로를 보고 키득거렸다.

잘자, 토오루.”

하지메쨩두 잘자!!”

밤인사를 마친 아이들은 아이들답게 순식간에 깊은 잠에 빠졌다. 여자아이는 잠버릇이 험한지 이리저리 움직였고 남자아이는 그런 여자아이의 모진 움직임에도 불편한 내색 하나 없이 평온하게 잤다. 은색 달빛이 은은하게 두 뺨을 비추고 남색 도화지에 점 찍힌 듯 밤하늘에 떠 있는 별들은 아이들을 지켜주는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가고 밤과 새벽 그 어느 중간에 창문 사이로 밤바람이 슬며시 방 안으로 발을 들여놨다. 남자아이의 밤갈색 머리를 간지럽히는 밤바람에 오이카와는 볼을 긁적이다가 졸린 눈을 슬며시 떴다. 살짝 입을 벌리고 잤는지 목이 매우 탔다.

귀찮기도 하고 밤이 깊어서 시끄럽기도 할 것 같은 마음에 오이카와는 물을 마시러 내려갈까 고민했지만, 점점 버석거리는 입안이 거슬려 결국 침대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잠이 덜 깬 몸은 뒤에 추라도 달린 것처럼 무거워서 오이카와는 삐걱거리는 몸을 움직여 일어서서 문가로 다가갔다.

우웅

그때였다. 침대에서 등을 지고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오이카와의 발걸음을 붙잡은 건, 뒤에서 들리는 작은 잠꼬대였다. 평소라면 돌아보지 않았을 텐데 그 날은 무엇인가 뒤통수를 잡아채는 느낌이 들었다. 남자아이는 그렇게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숨을 바짝 마른 목구멍으로 삼켰다.

말려 올라간 소녀의 상의 밑으로 보이는 뽀얀 속살에 시선을 빼앗겼다. 소녀가 뒤척일 때마다 살짝 보이는 분홍빛의 작은 유실은 소년을 남자로 만들었다. 소년은, 남자는, 오이카와는 발걸음을 돌려 다시 제가 누워있었던 쪽으로 다가갔다. 가까이서 본 초록색 잠옷 위로 작게 솟아오른 가슴은 탐스러워 보였다. 아직 채 성숙하지 못해 봉긋하게 형태만 자리 잡은 풋살구 같은 가슴을 바라보면서 오이카와는 갈증으로 타던 입안에 침이 고이는 것을 느꼈다. 그는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처 깨닫기도 전에 이미 덜덜 떨리는 손을 탐스러워 보이는 그곳으로 가져갔다.

손가락을 타고 전해지는 살짝 탄 소녀의 피부는 부드러웠다. 탔지만 뽀얗고 보드라운 살을 느끼면서 곰실거리는 그의 욕망이 소녀의 몸에서 가장 솟아오른 부분으로 향했다. 살집이 약간 모여진 가슴은 비단과도 같은 부드러움을 느끼게 해 오이카와는 실로 황홀했다. 에둘러 만져지는 젖가슴이 말랑하기도 하고 탐스럽기도 했다. 마치 분 냄새가 날 것 같은 기분에 오이카와는 그곳에 제 코를 박고 숨을 들이쉬고 싶었다.

소녀가 다시 몸을 움직이자 그는 화들짝 놀라 소녀를 탐하고 있던 욕망을 재빨리 거두었다. 가슴이 이렇게 뛰었다 싶을 정도로 두방망이질 쳤다. 더는 하면 안 됐다. 그랬는데 그렇다고 생각했는데, 그의 탐욕 가득한 눈을 다시 사로잡은 것은 이제는 옷이 다 말려 올라가 확실하게 보이는 작고 귀여운 돌기였다. 연한 분홍색의 그것은 선악과만큼 강렬한 유혹으로 다가와 오이카와는 급히 거두었던 손을 다시금 뻗었다. 만지고 싶다. 오이카와를 순식간에 침식한 감정은 그를 본능대로 움직이게 하는 짐승이 되게 하였다. 차가운 손가락이 돌기에 닿자 그녀는 작게 바르르 떨었으나 이내 다시 고른 호흡을 내쉬었다. 가슴살과는 다른 느낌으로 돌기에서 전해지는 말랑함에 오이카와는 입안을 가득 채운 침을 삼켰다. 살짝 주변을 손가락으로 빙그르르 돌려보고는 엄지와 검지를 사용해 분홍빛 유실을 잡아봤다. 작고 덜 여문 돌기는 그의 손에서 처음으로 농락당했다. 이것으로는 부족해. 오이카와 내면에서 꿈틀거리던 욕망이 결국 그를 한입에 삼켰다. 그는 돌기에서 손가락을 때고 손바닥을 쫙 펼치더니 소녀의 성숙하지 못한 작은 젖무덤을 우악스럽게 쥐었다. 그의 작지 않은 손은 소녀의 그것을 뿌듯하게 움켜쥐었다.

갑자기 가해지는 생경한 아픔에 소녀는, 이와이즈미는 신음을 흘렸다. 그제야 오이카와는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깨달았다. 다시 남자에서 소년으로 돌아온 오이카와는 부끄러움과 민망함 그리고 후회로 점철된 마음이 밀려들어 왔다. 소년은 소녀의 말려 올라간 상의를 잡아내려 자신의 욕망으로 일그러진 부분을 덮어주었다. 몸이 따스해지자 아까의 아픔을 잊은 건지 소녀는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달빛이 비춰주고 있는 소녀의 뺨은 발그스레해 보였다.

이와이즈미가 자고 있는 침대 앞에 오이카와는 털썩 주저앉았다. 더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을 뿐더러 죄책감이 그를 숨 막히게 했다. 저 자신이 더럽혀 버린 소녀는 세상에서 가장 평온한 표정으로 자고 있었다. 오누이같이 함께 자라던 소녀를 오늘 밤 그가 범했다.

그런데도 자신이 소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깨달은 소년은 숨을 죽여 눈물을 흘렸다. 더러운 감정이 사랑이라는 이름을 포장한 것만 같아 소년은 애써 부정하려 했다. 그러나 이미 추악하고 욕망에 찌든 자신이 고고하고 순결한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은 진실이었다. 이런 감정을 느끼는 스스로가 더럽고 추하게 느껴져 오이카와는 자신을 힐난했다. 더는 소녀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소녀를 사랑했다.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한다.

오이카와는 사랑하는 소녀를 바라보면서 자신을 욕했다. 나는 너를 더럽혔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너를 범했다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를 사랑한다고, 이 사랑을 이렇게 표현해 깨달은 나 자신이 역겹고 추하다고, 나는 네 옆에 있어서는 안 될 사람이라고, 그래도 네가 없으면 이제는 안돼서 떠날 수 없다고. 소년은 그 누구도 들을 수 없는 말들을 속 안으로 삼켰다.

소년은 자고 있는 소녀의 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사랑해, 하지메쨩. 오이카와는 목구멍이 탔다. 갈증이 일어났다. 아마 그때부터 오이카와는 사막에 버려진 사람처럼 매일 갈증을 느꼈다.

 



꿈은 무의식의 반영이라고 흔히들 말했다. 매번 주기적으로 꾸는 이 꿈은 아마 신이 자신에게 내린 형벌이라고 오이카와는 생각했다. 어린 날의 풋내 나는 짝사랑의 깨달음이 오이카와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놨다. 땀에 절여 깨어난 그는 아직까지도 저릿한 제 손을 주억거려봤다. 분내 날 것 같은 그 날의 감촉이 아직도 남아있는 느낌이었다. 무에 찝찝한 기분이 들어 아래를 바라보니 제 욕망의 원천이 탐욕을 토해낸 흔적이 보였다. 오이카와는 욕을 한번 지껄이더니 제 속옷을 벗어 화장실로 향했다.

아침에 깨끗하게 세탁되어있는 교복을 입으니 기분이 껄끄러웠다. 깨끗한 겉면에 비해 제 안은 악취가 풍겼다. 오이카와는 셔츠 제일 위의 단추를 푸르고 대문을 나섰다. 신발을 아스팔트에 탁탁 구르고 밑을 바라보던 얼굴을 들어 앞을 봤다. 탁 트인 숨 막히는 전경에 그는 멍청하게 앞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가자.”

그녀였다. 아아, 나의 하지메. 꿈과는 다른 이제는 제법 여자의 티가 나는 소녀였다. 길었던 머리는 짧아지고 키는 커졌으며 그때는 작았던 가슴은 제법 부풀어 연보라색 블라우스 아래로 봉긋 솟아있었다. 오이카와는 제 욕망으로 점철된 시선을 급하게 거두었다. 먼저 걸어가는 이와이즈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그는 그녀의 그림자를 밟아 따라갔다. 오늘따라 그녀를 뒤따라가는 것이 힘들었다. 그녀의 손을 잡고 거리를 걷고 싶었고 그녀와 얼굴을 마주하고 재잘거리고 싶었다. 그녀의 숨결을 느끼면서 몸을 맞대고 싶었고 그녀의 포근한 품 안에서 기대어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그렇지만 오이카와 토오루는 더러웠다. 스스로를 그렇게 여겼다. 정결하고 풋내 나는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가 마음에 담을 수 없을 만큼 머나먼 사람이었다. 육신은 이리도 가까운데 영혼은 이토록 멀 수 없었다. 끝내 다다르지 못할 사랑이 가여운 마음이 드는 자신의 꼴이 오이카와는 너무나도 역겨워 치를 떨 만큼 냉대했다. 자리를 잡을 수 없는 그녀를 향한 사랑의 씨앗은 오늘도 양분을 받지 못한 척박한 토양 위에 방치되어 썩어갔다.

왜 이렇게 멀리 떨어져서 걸어.”

?”

죄진 사람처럼 뒤에서 걷느냐 이 말이야.”

돌연 멈춰선 그녀는 땅을 바라보며 걷던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오이카와상이 옆에 없어서 이와쨩 외로웠어요?”

무슨 말을 못하겠네.”

오이카와의 장난스러운 말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이와이즈미는 다시 제 갈 길을 걸어갔다. 그녀가 자신을 신경 써주는 것이 기뻐 오이카와는 잔걸음으로 그녀 옆에 나란히 서서 걸어갔다. 단번에 풍기는 그녀의 비누 냄새에 마른 육신이 물 한 모금이 부여된 느낌이었다. 이와이즈미 옆에서 나란히 걷는 다는 것과 그녀가 자신을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쭐한 감정이 들은 오이카와는 충동적으로 그녀에게 여태까지 마음속에 담아왔던 질문을 조심스럽게 꺼냈다.

이와쨩.”

?”

이름으로 불러도 돼?”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걷고 있던 그녀의 걸음걸이가 멈췄다. 우뚝 선 그녀는 맞서오는 바람에 짧은 머리와 치마가 일렁이고 있었다. 조금은 기대해도 될까.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는 것을.

아니.”

우쭐했던 감정이 우악스러운 갈고리에 꿰여 어두운 구덩이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굳어가는 표정을 오이카와는 숨길 수 없었다. 그녀에게 거부당하는 것은 예상보다 배는 더 힘들었다.

미안

미안 할 거 없어. 네가 먼저 시작한 거니깐.”

?”

중학교 입학식 다음날, 네가 성으로 부르자고 했잖아.”

담담하게 말하는 이와이즈미의 말투에는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랬다. 오이카와는 제 입으로 그녀와 자신의 사이를 벌려 놨다. 탐욕의 나락으로 떨어진 그 이후, 오이카와는 소녀의 순수한 이름을 뱀과 같은 자신의 혀로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소녀에게 서로의 성을 부르자고 제안 아니 통보했다. 소녀는 그 말을 듣고 지칠 때까지 울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일방적인 통보에 처음에는 울면서 화를 내기도 하고 나중에는 애원하기도 했다. 그러나 오이카와는 더는 이와이즈미를 더럽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오이카와는 차오르는 눈물을 애써 삼켰다. 벌려놓은 간격을 유지해야 했는데 쉽지가 않았다. 이제 다시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와야 할 시간이었다.

아 맞아! 못생긴 이와쨩을 보고 너무 놀라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

얼버무리려는 오이카와의 의도를 알아챘는지 그녀는 불편한 표정으로 그를 한번 바라보더니 이내 시선을 거두고 원래 가던 길을 걸어갔다. 멀어지는 그녀를 복잡한 심경으로 바라보다가 오이카와 역시 그녀의 발자취를 따라갔다.

 



엄마, 토오루는 가기 싫어요.”

있는 힘껏 볼을 부풀린 기껏해야 예닐곱 살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어머니로 보이는 여인에게 말했다. 새하얀 셔츠와 무릎까지 오는 베이지색 바지를 입은 남자아이는 앙증맞은 빨간 보타이를 목에 걸고 있었다. 어린이 체육관 앞에 서서 떼를 쓰고 있는 아이는 그 안에 들어가기 싫은지 발을 콩콩 굴리면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우다다다 꺼냈다.

이렇게 멋있게 입고 나왔는데! 토오루는 배구 안 해요!”

그래도 응?”

뛰어다니기 싫어해서 집에만 있거나 여자아이들과 놀기를 좋아하는 어린 오이카와가 걱정된 어머니는 주변에서 새로 시작하는 어린이 배구교실에 아들을 넣어보라는 권유를 받고 체육관에 억지로 데려오던 참이었다. 성 역할의 고정관념이라기보다는 집에만 있어서 소극적인 성격에 친구를 못 사귀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어 운동이라도 하면 조금이나마 활달해질까 생각해서 그 의견을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예상대로 오이카와는 배구교실에 가는 것을 완강히 거부했다.

싫어요! 배구 안 할 거예요!”

토오루, 오늘 배구 교실 갔다 오면 엄마가 우유빵 사줄게.”

결국,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특별한 조치를 했다. 오이카와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하는 우유빵을 비장의 카드로 꺼낸 것이었다. 평소라면 밥을 먹으라며 빵을 사주지 않아서 불만이 많았던 오이카와는 이 달콤한 꼬임에 고민이 들기 시작했다. 작은 손가락을 꼼지락대면서 오이카와는 골똘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우유빵 두 개 사줄게.”

정말이지?”

토오루가 갔다 오면 꼭 우유빵 사줘야 해요!”

그래, 약속.”

오이카와는 조막만 한 손가락을 어머니의 손가락에 걸어 약속하고는 아직도 뭐가 그리 못마땅한지 툴툴대면서 체육관에 들어갔다. 이제 어머니도 없이 홀로 넓은 체육관에서 있어야 했다. 불현듯이 밀려오는 불안감에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오이카와는 친구를 사귀는 것도 서툴렀고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 혼자 있는 것도 무서워했다. 덜컥 겁이나 큰 눈에 방울방울 눈물이 맺혔다. 으으, 울면 꼴사나울 거야. 최대한 울음을 참아봤지만 곧 떨어질 거 같이 그렁그렁 맺힌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흐려졌다. 이런 게 싫어서 배구교실 따위는 오고 싶지 않았다. 계집애 같다고 놀리면서 손가락질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무섭고 또 무서웠다. 혼자가 된 느낌은 정말 싫었다.

괜찮아?”

누군가의 음성이 불쑥 들려왔다. 오이카와는 놀란 마음에 맺혀있던 눈물이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입을 헤 벌린 채 말을 걸어온 사람을 바라봤다. 저보다 조금 큰 까무잡잡한 여자아이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너 울잖아. 무서워?”

소녀는 손을 들어 오이카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리고는 오이카와의 손을 꼭 잡았는데 소녀의 손은 참 따뜻했다. 소녀의 손을 타고 전해지는 안심감은 오이카와를 포근하게 다독여줬다.

나도 여기 처음이라 친구가 없어. 나랑 친구 할래?”

활짝 웃으면서 물어오는 여자아이에게 오이카와는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난 이와이즈미 하지메! 하지메라고 불러도 돼!”

나는 오이카와 토토오루. 토오루라고 불러도 돼

, 토오루! 오늘부터 우린 친구야!”

고마워하지메쨩

하지메쨩? 으하하. 귀여워, 토오루!”

잡은 손을 위아래로 크게 흔들면서 웃는 이와이즈미는 마치 천사 같아 보였다.

 

배구 교실이 끝나고 이와이즈미와 손인사를 하며 헤어진 오이카와는 혼자 벤치에 앉아 어머니를 기다렸다. 다른 아이들이 모두 떠나고 홀로 벤치에 있던 오이카와는 이와이즈미가 잡아준 제 손을 한 번 바라보더니 배시시 웃었다.

토오루! 엄마가 많이 늦었지?”

멀리서 손에 든 우유빵을 흔들면서 오이카와의 어머니가 벤치로 다가왔다. 오이카와는 반가운 마음에 한달음에 달려가 어머니를 껴안았다.

오늘 잘 놀았어요?”

두 뺨을 단풍처럼 수줍게 물들이면서 오이카와가 대답했다. 의외의 대답에 눈이 동그래진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별일이라는 듯 다시 오이카와에게 물어봤다.

정말?”

! 토오루 오늘 친구 만들었어요!”

멋지구나.”

배구 교실을 나간 지 하루 만에 친구를 만들었다고 자랑하는 자기 아들이 너무나도 귀여워 보여 오이카와의 어머니는 손을 들어 풍성한 머리칼을 쓰다듬어줬다. 그리고 오이카와 뺨에 키스를 한번 해주고는 친구를 사귀어서 뿌듯해 보이는 아들을 안아 올렸다. 어머니가 안아준 것이 만족스러운지 그녀의 옷깃에 이마를 부비면서 오이카와는 응석을 부렸다.

집에 가자, 엄마가 맛있는 거 만들어놨어.”

, 엄마!”

무엇인가 생각났다는 듯이 오이카와는 눈을 번쩍이면서 자신의 어머니를 불렀다.

?”

어머니의 물음에 오이카와는 다시 볼을 붉히더니 뽀얀 손을 들어 그녀의 귓가에 댔다. 마치 비밀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저 오늘 천사를 만났어요.”

 



매번 똑같은 날이 반복되었다. 이와이즈미를 생각하고 그리워하다가 자책하는 그런 나날들이었다. 타는 갈증을 채워보기 위해 오이카와는 오늘도 자신을 둘러싼 여학생들과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았다. 무의미한 말들과 영혼 없는 웃음이 오가는 이 상황이 너무 가식적였다. 슬슬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는 생각이 들 무렵 계속 조잘거리던 한 여학생이 손뼉을 치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보라는 듯 큰소리로 오이카와에게 말했다.

, 오이카와군. 그 이야기 알지?”

? 무슨 이야기?”

이와이즈미 이야기 말이야.”

여학생이 눈을 반짝이며 오이카와를 떠봤지만 전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았다. 애써 당황스러움을 감춘 채 오이카와는 아무렇지 않은 척 반문했다.

모르겠는걸?”

이번에 소개팅한 남자랑 잘돼서 사귀나 봐.”

관심 없어 보이더니 사실은 아니었나 보네!”

평소 이와이즈미와 오이카와의 관계를 질투한 여학생들은 부리나케 달려들어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했다. 죠젠지에 다니는 남학생이라는 정보까지 흘린 여학생들은 아무 말도 없이 허공만 바라보는 오이카와를 눈치 채고 서로 말소리를 낮췄다. 무표정이던 오이카와는 주위가 조용해진 것을 느끼고는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여학생들에게 이야기했다.

이와쨩 일이니깐. 근데 못생긴 이와쨩인데도 용케 남자한테 고백받았네.”

원래 말투로 돌아온 오이카와를 바라본 여학생들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아까처럼 다시 재잘거렸다.

오이카와군! 이와이즈미는 그래도 매력 있게 생겼잖아.”

매력? 나는 이와쨩의 매력이 어디 있는지 모르겠어.”

짓궂다~ 오이카와는

꺄르르 웃는 소리가 복도에 하릴없이 울려 퍼졌다. 오이카와는 치밀어 오르는 구역질을 애써 삼킨 채 주먹을 꽉 쥐고 거짓 웃음을 지어 보였다.

 

정말이야?”

어둑어둑해진 골목길을 걸어가면서 뜬금없이 오이카와가 말했다. 보조를 맞춰 걷고 있던 이와이즈미는 생뚱맞은 소리를 한 오이카와를 쳐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뭐가.”

뭔데.”

죠젠지 남자랑 사귄다는 거 진짜야?”

그건 어디서 들었는데.”

오늘애들이 말하는 걸 들었어

이와이즈미는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보다 한참 큰 오이카와를 올려다봤다. 까맣고 빛나는 그녀의 눈에 오롯이 오이카와가 담겼다.

맞아.”

?”

사귄다고. 죠젠지 남자애랑.”

누군가가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후려친 느낌이었다. 머릿속에서는 이명이 들렸고 오이카와는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애써 억눌러봤다.

하하, 못생긴 이와쨩이 남자를? 거짓말하지 마. 이 오이카와상에게는 안 통한

진짜야.”

경직된 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거짓말하지 말라고 말했지만, 진짜라고 말하는 이와이즈미의 흔들림 없는 표정에 오이카와는 끝내 말을 잇지 못했다. 누군가의 여자가 되는 이와이즈미는 생각해보지도 않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천사여야 했다. 그 누구도 손 끝 하나 대지 못하는 저 하늘 위의 천사. 이건 오이카와가 바라던 현실이 아니었다.

? 대체 어째서

그걸 내가 너에게 왜 알려줘야 해?”

또렷한 음성으로 자신의 말을 전달하는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에게 질문을 되돌려줬다. 확실한 건, 이와이즈미의 사생활인 연애 문제에 대해 오이카와에게 다 이야기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그녀와 그는 소꿉친구 사이었을 뿐 가족도 아니었으며 동성 친구 사이도 아니었다. 오이카와는 제 목을 조르는 이 순간순간이 저주스러웠다.

이와쨩.”

좋아해서 사귄 거야.”

오이카와의 심장이 도려내졌다. 잔인한 칼이 마구잡이로 파낸 오이카와의 검붉은 심장은 찐득찐득한 피를 뚝뚝 흘렸다. 자신이 저질러버린 죄의 대가는 참으로도 컸다. 그리고 가질 수 없는 그녀를 탐낸 오이카와에게 하늘이 내린 벌이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잘못이라면서 제 탓을 해오던 오이카와조차 이번에는 하늘을 원망했다. 제발, 어떤 벌이라도 저주라도 괜찮으니 저에게서 그녀의 곁을 빼앗지 말아 주세요. 피눈물이 나는 오이카와는 애걸복걸하면서 보이지 않는 신에게 간절하게 빌었다. 그렇지만 신은 그를 배신했다. 조각난 마음과 탐욕이 바닥에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떨어진 조각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우는 검은 인영을 보면서 그녀를 향한 마음을 주울 용기조차 가지지 못했다. 무기력해진 자신이 밉고 증오스러웠다.

차라리 두 귀가 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지저귐을 들을 순 없지만, 그녀와 다른 남자의 속삭임을 듣지 않을 수 있었다. 또 두 눈이 멀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을 볼 순 없지만, 그녀와 다른 남자가 사랑하는 장면을 보지 않아도 되었다. 제 눈과 귀를 베어내도 포기할 수 없는 건 그녀였다. 어린 날 치미는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녀를 탐한 뒤로부터 철저하게 그녀는 오이카와의 우상이 되었다.

그랬던 그녀가 이제는 자신을 떠났다. 원래 제 것이 아니었던 자리에 앉은 사람처럼 미련 없이 일어났다. 멀어지는, 뒷모습마저 사랑스러운 이와이즈미는 오이카와 토오루라는 사람에게 등을 돌렸다. 싫어, 싫어. 오이카와는 한 손에 잡히는 그녀의 어깨를 쥐고 마지막 실낱같은 희망을 쥐어짜내 갈증으로 메마른 목소리를 만들어냈다.

하지메쨩

보기 좋게 옆으로 째져있던 이와이즈미의 눈이 커졌다. 그 옛날 서로를 이름으로 불렀던 그때처럼 오이카와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더러운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그녀의 이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러워 오이카와는 넘쳐흐르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놀란 눈으로 대답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이와이즈미 때문에 오이카와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이름을 목구멍에서 끄집어냈다.

하지메

다시 불린 자신의 이름을 들은 이와이즈미는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오이카와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고 입을 열었다.

다시는 이름 부르지 마.”

다시는 내 이름 부르지 마.’

이제 우리는 컸으니깐 이름 부르지 마.”

나랑 이와쨩은 어른이니깐 이름 부르지 마.’

난 이와이즈미고 넌 오이카와야.”

오늘부터 난 오이카와고 넌 이와이즈미야.’

이와이즈미를 처음으로 밀어낸 날, 오이카와가 울며불며 매달리는 이와이즈미에게 차갑게 던진 말들이었다. 모질게 그녀에게 쏟아냈던 말들이 다시금 날카로운 창으로 변해 오이카와를 꿰뚫었다. 이미 도려내져서 뻥 뚫린 가슴은 어떤 방패막이도 없이 차가운 쇠붙이들을 받아냈다. 후벼지고 찢긴 가슴은 아직도 그녀가 주인이라는 듯 그녀의 목소리에 반응했다. 이와이즈미가 뱉어낸 문장의 의미를 깨달은 오이카와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내어 원래의 음색으로 이야기했다.

못생긴 이와쨩은 아직도 그걸 마음에 가지고 있었던 거야? 못나기도 한데 속까지 좁네! 아 맞아. 오이카와상은 약속이 있어서 여기서부턴 혼자 가야 할 거 같아요~ 못생긴 이와쨩이니깐 밤길은 안심이겠지?”

마치 몇 번이고 준비해왔던 말처럼 매끄럽게 말했다. 그리곤 이와이즈미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오이카와는 골목을 꺾어 쭉 달려갔다. 숨이 차서 턱밑이 덜덜 떨릴 때까지 달리고 달렸다. 그녀를 향한 갈증에 더는 숨 쉴 수 없을 때 오이카와는 제 다리를 멈추고 돌담 한쪽에 몸을 기댔다. 메말라 버석거리는 입안은 모래라도 있는 것처럼 까슬까슬했다.

더는 이와이즈미에게 다가갈 수 없다는 사실이 오이카와를 비웃었다. 단비 같은 그녀를 잃어버린 오이카와는 점점 심해지는 갈증을 이길 수 없을 것이다. 그 와중에도 몸은 정직했기에 그녀의 까만 머릿결과 선홍빛의 입술이 생각나게 해 그의 애걸함을 달래주려 했다. 반사작용처럼 튀어나오는 그녀의 모습에 잠깐의 쾌락을 느낀 오이카와는 그런 자신의 모습에 환멸을 느꼈다.

오이카와는 균일하지 않게 배열된 돌담에 자신의 머리를 박았다. 시야가 흔들리면서 충격이 서서히 밀려왔으나 개의치 않고 다시 아까의 행위를 반복했다. 두어 번 더 반복했을 때, 관자놀이를 타고 척척한 액체가 흘러 내려왔다. 피였다. 빠져나가는 피의 촉감을 느끼면서 오이카와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점점 상쾌해지는 기분이 들어 마지막으로 오이카와는 담에 머리를 박더니 그대로 바닥에 앉았다. 질질 턱을 따라 흘러내리는 피는 방울져 오이카와의 교복 바지 위로 떨어졌다. 검붉은 피가 떨어진 다리를 바라보던 오이카와는 무릎에 아이싱 하라는 그녀의 음성이 떠올라 막연히 기분이 상쾌해져 주변을 둘러봤다. 그녀의 관심을 받은 무릎에 질투가 났다. 한 뼘 벌어진 거리에 주먹만 한 돌이 있었다. 오이카와는 그 돌을 주워 제 무릎을 세게 쳤다. 얼얼한 고통이 무릎을 타고 엉치뼈까지 올라왔다. 다시 무릎을 내리쳤을 때, 플라잉으로 다쳤던 그때의 고통과 흡사해 만족감을 느끼고 돌을 내려놨다. 이쯤 했으면 그녀에게 했던 나의 죄가 조금이라도 용서받았을까.

흐르는 것을 흘러가게 내버려 뒀다. 오이카와는 이제 다른 사람의 곁에 있는 그녀를 받아들여야 했다. 아니, 그녀는 나만의 그녀였다. 그렇게 생각하니 모든 것이 편해졌다. 그녀가 누구와 있어도 그녀는 자신만의 이와이즈미 하지메였다. 떨고 있는 내 손을 잡아준, 달빛이 비친 침대 위에서 뽀얀 살을 탐하게 했던, 다쳐 온 자신을 혼냈던, 우승할 때 함께 울어주었던 그녀는 오직 오이카와의 소유였다. 눈앞에 이와이즈미가 나타났다. 어렸을 적 그 모습이기도 한 것 같고 아까까지 봤던 여자의 모습이기도 한 것 같았다. 뭐래도 좋았다, 그녀니깐. 점점 자신에게 다가오는 그녀는 흐릿한 모습으로 오이카와 앞에 섰다. 사랑스러운 그녀는 오이카와가 빚어낸 그림자였다. 그러나 자신이 만들어낸 이와이즈미의 환영을 두 팔 벌려 껴안은 오이카와는 타는 갈증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봄비가 돌아왔다. 끌어안은 그녀는 오이카와의 얼굴에 입을 맞췄다. 아아, 나의, , 나만의.

하지메

이와이즈미의 이름을 그녀에 대한 사랑을 담아 거짓으로 점철된 입을 통해 밖으로 토해냈을 때, 품 안에 있던 그녀가 희뿌옇게 되더니 이내 공기 중에 흩어졌다. 마치 신기루가 보이다가 가까이 다가가면 사라지는 것처럼 가질 수 없는 그녀는 그렇게 다시 오이카와를 떠났다. 물 한 모금조차 허락되지 않는 애끓고도 처연한 감정들이 오이카와를 잠식해나갔다. 그때나 지금이나 그녀는 오이카와에게 곁을 내어주지 않았다. 아니, 그 아슬하고도 위태로운 간격을 만들어 이와이즈미를 바라보기만 하려던 것은 저였다. 이 상황들과 모든 순간순간은 오이카와의 잘못이라고 손가락질했다. 웃음이 나왔다. 탐내지 말라던 선악과를 따먹고 에덴동산에서 쫓겨난 인류의 조상처럼 오이카와도 자신의 것이 아닌 걸 탐낸 결과 그녀의 옆에 서 있는 것마저도 이제는 할 수 없었다.

다시 저 멀리서 그녀가 걸어왔다. 아니 뛰어온 것일까. 어릴 적 풋내 나는 욕정으로 탐한 가슴을 들썩거리면서 그녀가 오이카와에게 다가왔다. 너는 왜 이리도 나에게 다정할까. 아직까지도 불결한 시선으로 너라는 사람을 탐내는 나를 그렇게 바라보지 마. 다시 희망을 품는 것도 내 몫으로 돌릴 테니 너는 그냥 그 자리에 있어 줘. 그렇지만 그녀는 자신이 만든 환영임에도 불구하고 오이카와의 의지를 배반하고 조금씩 앞으로 걸어왔다. 이제는 조금 안정된 호흡을 내뱉는 그녀의 입술에서는 생명의 바람이 나왔다. 오이카와는 그녀의 향기를 맡으면서 풀리지 않는 갈증에 드디어 봄비로 적셔지는 느낌이 들었다. 널브러져 있는 오이카와 앞에 쪼그려 앉은 이와이즈미는 그의 얼굴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더니 뺨에 그녀의 손을 댔다. 아까의 키스보다도 황홀한 그녀의 섬세한 손길에 오이카와는 얼굴을 기대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사랑해하지메

오이카와는 그 날 이후 처음으로 눈물을 흘렸다.

 


 

Genderbend

 

 


201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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