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37

pinn_pond 2016. 1. 16. 23:52


37

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싫어

켄마, 딱 한 번만!!!”

제 앞에서 손뼉을 마주하고 무릎을 꿇고 있는 사내를 보아하자니 켄마는 마음이 갑갑했다. 저번 주부터 한가지의 주제를 가지고 끈질기게 부탁하는 쿠로오를 보면 들어줄 만도 싶었지만 그가 부탁하는 내용은 켄마의 상식 밖이었다. 아직까지도 보이는 검은 뒤통수를 마주하자니 켄마는 보스 공략에도 끄떡하지 않은 머리가 지끈지끈 거리는 것 같았다.

쿠로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약간의 짜증과 한숨이 묻어나오는 질문을 했다. 그제야 쿠로오는 제 얼굴을 들어 켄마를 마주했다. 멋쩍은 웃음을 지으면서 쿠로오는 입을 열었다.

중학교 때부터 내 로망이었어.”

켄마는 어처구니없는 말에 자신도 모르게 실소가 나갔다. 뭐 로망은 좋았다. 켄마 자신도 남자이므로 그런 류의 환상이 이맘때쯤의 청소년들에게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켄마는 딱히 로망이랄 것이 없었지만 주변의 이야기나 앞에 있는 제 소꿉친구이자 연인인 남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그래도세라복은 좀 아니지 않아?”

세라복이 어때서!!!”

쿠로오는 켄마의 말에 발끈하더니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켄마는 쿠로오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랐지만 뒤이어 나오는 세라복에 대한 예찬에 다시 고개를 저었다. 일본 남학생이라면 응당 가지고 있는 환상이다부터 시작해서 중앙에 달린 빨간 리본이 얼마나 남심을 동하게 하느냐와 치마 기장은 무릎 위 5cm여야 한다까지 쿠로오는 쉬지도 않고 줄줄이 쏟아냈다. 끝으로 니삭스와 구두는 화룡점정이라는 말까지 하며 세라복 전도사 쿠로오의 간증 아닌 간증이 끝났다.

그러니깐 세라복이 최고라는 거야.”

그래

입어주는 거야?”

아니

너무해!!!”

쿠로오의 절규가 켄마의 방 안을 가득 메웠다. 시끄러운 소리에 켄마는 한 손으로는 귀를 막고 다른 손으로는 PSP를 꺼내 전원 버튼을 눌렀다. 무시하다보면 가겠지 하는 생각이었다. 최근 받은 게임을 누르고 인트로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불쑥 쿠로오의 목소리가 들렸다.

, 그러고 보니 폴아웃4 한정판이 일주일 뒤에 나온댔지.”

A버튼을 누르려던 켄마의 손가락이 멈췄다. 쿠로오는 그런 켄마의 모습을 슬며시 바라보더니 입꼬리를 올리고 딴청 피우는 척하며 다시 말했다.

도그밋 인형이랑 볼트111 후드도 준다는데

결국 켄마는 PSP를 내려놓고 제 책상에 기대서 기분 나쁘게 웃으며 말하는 쿠로오를 바라봤다.

아마 팬 배지랑 가방도 준다고 누구누구씨랑 같이 기사 본거 같아.”

얄밉게도 말했다. 켄마는 저렇게 말하는 쿠로오의 저의를 알고 있어 그가 더 얄밉게 보였다. 할 수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저 입을 때리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하지 못하는 이유는 쿠로오는 운이 좋았다. 무슨 운이냐 하면 한정판을 살 수 있는 운이었다. 덕후는 계를 못 탄다고 말한 명언을 켄마는 쿠로오를 보면서 느꼈다.

게임을 좋아하는 켄마는 한정판에 대한 욕심이 꽤 있는 편이었다. 다른 곳에 무기력한 켄마였지만 게임만은 그 열정이 달랐고 게임광들은 으레 그렇듯이 한정판에 대한 욕심이 대단히 컸다. 몸을 움직이기 귀찮은 켄마조차 한정판을 사기위해 게임센터 앞에 몇 시간을 기다리는 기적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한정판은 켄마 손에 들어오지 못했다. 꼭 켄마 전이나 전전에서 매진되고는 했다. 그래서 어쩌다가 쿠로오가 함께 한정판 대기 줄을 기다려 줬는데 쿠로오는 한정판을 사고 켄마는 사지 못했다. 그 이후로 쿠로오는 켄마가 배구 연습에 성실히 임한다는 조건을 내걸고 종종 한정판 게임을 사다줬다. 많은 사람이 기다렸지만 산 사람은 손에 꼽는다는 디아블로3 한정판도 쿠로오 테츠로는 손쉽게 얻어 켄마의 눈앞에 대령해내는 남자였다.

폴아웃 시리즈는 켄마가 좋아하는 게임 중 상위 랭크에 등재된 게임으로 이번에 나오는 한정판은 정말 소수의 사람만이 살 수 있도록 제작 중이라고 발표했다. 쿠로오와 함께 게임 기사를 보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읽었지만 오랜 소꿉친구의 눈으로 쿠로오는 기대에 가득찬 켄마의 표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는 기회주의자답게 하늘이 주신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도쿄에 사는 모모씨는 한정판을 사실 수 있으련 가 모르겠다.”

자꾸 깐족대는 쿠로오를 보면서 켄마는 마음속에 두 가지 생각이 심하게 대립하는 것을 느꼈다.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지키자는 천사와 그깟 자존심이 뭐냐, 한정판은 두 번 다시 얻을 수 없다는 악마가 치열하게 다투고 있었다. 켄마는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다 어렵게 입을 땠다.

……

?”

뭐라구요? 잘 안 들리는 데

하면 되잖아!!!”

한정판 앞에서 한없이 약해지는 남자 코즈메 켄마는 결국 악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오늘따라 또다른 악마로 보이는 쿠로오가 히죽거리면서 두 발짝 다가왔다.

무르기 없기다.”

쿠로야말로 한정판 꼭 사와야 해

맡겨만 주십시오!”

장난스럽게 한 쪽 무릎을 꿇으며 켄마의 오른 손등에 입을 맞췄다. 그 행동이 부끄럽고 또 쿠로오의 페이스에 휘말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켄마는 내려났던 PSP를 다시 집고 A버튼을 눌렀다. 화면에 보이는 케릭터를 움직이려는 찰나 검은 악마가 다시 속삭였다.

저기 켄마

또 왜

흑세라로 부탁해

음흉한 미소를 지으면서 어이없는 추가사항을 말하는 쿠로오를 켄마는 진심으로 한 대 때리고 싶었다.



 

우와 켄마 잘 어울리는데?”

뒷골목에 보이는 질 나쁜 남자들처럼 쿠로오는 낮게 휘파람을 불면서 켄마에게 말했다. 지금 쿠로오의 앞에는 뿌리염색이 필요한 금발의 키 큰 소녀가 서있었다. 검은 세라복을 입고 빨간 타이를 두른 소녀는 허벅지 중간 쯤 오는 기장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 밑으로는 하얀 니삭스와 짙은 갈색 구두를 신고 있었다. 문제라면 사실 그 소녀는 남자였다.

생각보다 더 좋아.”

어느새 옆까지 다가와 켄마의 어깨를 짚으면서 쿠로오는 여기저기 뜯어 살펴봤다. 살짝 풍기는 비누 향기가 정말 청소년 잡지에 나오는 교복 모델 같은 느낌을 줘 몇 번이고 켄마를 봤다. 그런 쿠로오의 모습과 여자 교복을 입은 자기 자신이 창피한지 켄마는 손으로 치마를 말아 쥐며 고개를 푹 숙이고 작게 말했다.

못 하겠어

엄청 부끄러웠다. 지난 밤 쿠로오가 던져주고 간 세라복을 보고 다음 날 아침에 입을 때 까지만 해도 그렇게 부끄럽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번화가에 나오기 전까지도 이정도면 눈 딱 감고 할만 한 것 같아 라는 게 켄마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약속 장소에서 쿠로오를 보자마자 갑자기 밀려드는 부끄러움에 제자리에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

왜긴

자 어서 가자. 타르트 맛있게 하는 집 알아놨어.”

타르트?”

타르트라는 말에 금세 화색이 돈 켄마는 조용히 쿠로오가 이끄는 대로 따라갔다. 고딕풍의 조용한 타르트 전문점은 사과 타르트와 호두 타르트가 유명한 집이라고 쿠로오는 소개했다. 언제 이런 곳을 알아왔는지 켄마는 의심스러웠지만 이내 입 속에 들어오는 사과 타르트의 맛에 원래 컸던 눈이 두 배는 더 커졌다. 꽤나 많은 양이었음에도 깨끗하게 접시를 비워낸 켄마를 보며 쿠로오는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손을 잡아 다시 거리로 나섰다.

맛있었어?”

다행이다. 인터넷으로 찾아봤거든

살짝 웃으면서 말하는 쿠로오를 보니 켄마는 꽁해있던 마음이 약간 풀리는 기분이었다. 제 딴에는 이것저것 많이 알아 와서 에스코트 하는 것이다 하는 생각이 켄마를 살살 달래주었다. 뭐 손해 보는 장사도 아니고 몇 시간만 참으면 한정판이 굴러 들어오니 켄마도 마음을 편하게 먹기로 했다.

뭐 아리따운 분과 함께 데이트를 하니 이런 타르트 집 정도는 기본 아니겠습니까. 하하

산통 깨는 쿠로오의 말에 켄마는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당장이라도 정강이를 걷어차고 뒤돌아 집으로 가고 싶었지만 아직도 켄마의 머릿속에는 한정판이 둥둥 떠다녔다. 반쯤은 제 신세에 대해 회의감을 느낄 때 쯤 다시 쿠로오는 볼일이 있다며 켄마를 어딘가로 데려갔다.

그의 손에 이끌려 간 곳은 중심가에 있는 큰 복합 쇼핑센터였다. 안으로 들어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3층 정도 올라갔을 때, 익숙한 곳이 켄마를 반겼다. 대형서점과 게임센터를 함께 하는 상점이었다. 가장 많은 게임을 구비하고 있어서 켄마는 종종 이곳을 방문했다. 쿠로오는 마주잡은 손에 힘을 약간 싣고 켄마를 살살 이끌었다.

쿠로, 여기는?”

, 나 책 사야할 게 있어서.”

쿠로오의 말에 켄마는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를 따라 서점 안으로 들어갔다. 무엇을 사는 가 지켜보니 쿠로오가 향한 곳은 수험서적 코너였다. 아무래도 3학년이다 보니 공부를 아예 안할 수가 없어서 인지 요새 쿠로오는 종종 수험서를 사곤 했다. 생각해온 수험서가 있는지 쿠로오는 두어 권을 뽑아 이리저리 비교를 하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더니 한 권을 꽂고 다른 한 권을 손에 든 채 나머지 왼손으로 다시 켄마의 손을 잡았다.

이제 계산을 하는가 싶었지만 쿠로오는 카운터를 지나 어디론가 갔다. 카운터 뒤 쪽으로 조금 깊숙이 들어간 곳에는 게임센터가 있었다.

쿠로

?”

여긴 왜

게임 하나 사주려고.”

쿠로오의 말에 켄마는 마음이 들떴다. 생각지도 않은 횡재에 이제는 켄마가 쿠로오를 이끌어 신작게임이 있는 곳으로 데려갔다. 아까 수험서를 비교하던 쿠로오의 표정보다 더 진지하게 켄마는 이것저것 바라보더니 회색 배경에 빨간 글씨로 써져있는 게임팩을 들었다. 기대감에 가득 찬 표정을 지으며 켄마는 쿠로오에게 게임팩을 내밀고 그는 게임팩을 받아들어 다시 앞 쪽의 카운터로 갔다.

다 합해서 5600엔입니다.”

잠시 만요.”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낸 쿠로오는 만 엔짜리 지폐 여섯 장을 꺼내 직원에게 내밀었다.

여자 친구 분이랑 사이좋으신가 봐요.”

?”

여자 친구 분이요.”

아아

직원의 말에 쿠로오는 제 옆에 꼭 붙어있는 켄마를 바라봤다. 아무래도 오해한 것 같았다.

제 애인이 저랑 떨어지지 않으려 해서요.”

두 분 잘 어울려요. 여기 있습니다. 안녕히 가세요!”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포장한 봉투를 받아들고 쿠로오는 고개를 숙이며 직원에게 인사하고 서점을 빠져나왔다. 몇 미터를 걸어 모퉁이를 돌 때, 참고 있던 웃음을 쿠로오는 크게 터트렸다. 한참을 그렇게 웃고 자신을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있는 켄마를 보고는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을 했다.

왜에

그만 웃어

화났어?”

별로

분명 화난 거라고 쿠로오는 생각했다. 삐죽 나온 입술이 켄마의 심정을 대변하고 있는 것 같아서 다시 터지려는 웃음을 애써 눌렀다. 어렸을 때부터 이렇게 켄마를 놀려먹던 버릇을 아직까지도 못 고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쿠로오가 생각하기에 자신을 여자 취급한 직원과 거기에 한 술 거들은 쿠로오가 켄마 눈에는 아니꼬웠던 모양이다. 조그만 머리로 무슨 생각을 하는지 훤히 보이는 느낌에 그는 켄마를 단숨에 안아 자신의 품에 넣었다. 그게 마음에 안드는 지 켄마는 놔달라는 듯 쿠로오의 어깨를 툭툭 쳤다.

여자 친구라고 나는 안했다.”

?”

애인이라고 했어. 여자 취급 한적 없어.”

그러면

?”

그러면 이건 뭔데…….”

켄마는 자신이 입고 있는 치마를 한 쪽 손으로 매만지며 말했다. 아직까지도 이것 때문에 꽁해있는 건가. 귀엽고도 앙큼한 제 연인을 바라보며 쿠로오는 켄마의 검은 머리카락 부분에 제 턱을 비볐다.

말했잖아, 로망이라고.”

뭐가 달라

엄청 달라. 그냥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내 로망을 실현시켜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 어쩌다 보니 그 로망이 여자 옷일 뿐인 거야.”

……말이나 못하면

켄마는 켄마라서 좋은 거니깐. 그 옷은 부가적인 콘텐츠 같은 거야.”

좋을 건 하나 없다구.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말하는 쿠로오를 보면서 켄마는 다시 느끼는 그의 사랑에 부끄러운 마음이 밀려 들어와 쿠로오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훤칠한 키의 남자와 흑세라복을 입은 금발의 여자가 껴안고 있는 형태는 사람들이 보기에 꽤나 좋은 그림이었다. 켄마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바르작거리며 좀 더 쿠로오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아 근데 좋은 거 하나 있는 거 같아.”

?”

. 갑자기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 뭐하는 짓이냐고 쿠로오의 가슴팍을 밀어냈지만 그는 켄마를 더 꼭 안을 뿐이었다.

이렇게 해도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

그렇게 말하고 씨익 웃더니 다시 켄마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였다. 아까보다 조금 더 진한 키스가 이어지고 켄마는 부끄러운 마음이 들어 이제는 정말 자신이 소녀가 된 건가 하는 어이없는 생각까지 했다. 두근거리는 마음은 이제 끝났을 텐데. 켄마는 시선을 내려 검은 치마와 하얀 니삭스를 보고 다시 시선을 올려 쿠로오를 바라봤다. 자신을 내려다보며 환하게 웃는 쿠로오를 보니 다시 가슴이 뛰었다. 두근. , 역시 이상해.

켄마.”

?”

좋아해.”

켄마의 어깨와 세라복 블라우스를 손으로 잡더니 쿠로오는 다시 켄마에게 키스했다. 달콤하고도 달콤한 키스였다.

 

 

 

 



2016.01.16.

for Rim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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