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로켄] 36

pinn_pond 2016. 1. 5. 22:34


36

쿠로오 테츠로/코즈메 켄마

 

 

 

 

연인 사이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고 같은 마음을 가진 다는 것이 얼마나 축복 받은 일인지 아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사람은 제 각각 다른 차이를 안고 살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한 가지 상황이 주어지더라고 개개인 마다 다른 선택에 의해 각기 다른 결말을 맞이하게 된다. 신이라면 이런 상황이 재밌었겠으나 직접 당하고 있는 당사자들에게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선택에 대한 실패할 확률이 성공할 확률보다 클뿐더러 자칫 잘못 하다간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낳는 경우도 있었다. 하루하루 신중을 기해 최선의 선택을 해야 하는 숙명을 타고 난 것이 사람이었다.

같은 마음. 세상에 똑같은 마음을 찾으라고 하면 찾을 수 없지만, 사람들은 비슷하다는 것도 같다는 테두리 안에 포함시켰다. 그만큼 같은 마음이라는 걸 가지고 싶어 한다고 볼 수 있었다.

코즈메 켄마도 같은 마음인 줄 알았다. 워낙 어렸을 때부터 함께 자라왔기 때문에 행동으로 표현하는 것만 다르지 생각하는 것은 같다고 여겼다. 쿠로오가 켄마에게 권하는 일은 틀리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 켄마가 거절해도 몇 번 끈질긴 설득에 함께 하기 시작하면 곧잘 따라왔다. 때로는 켄마가 잘못된 선택을 했을 때 엄한 말로 바로 잡아준 것도 쿠로오였다. 쿠로오는 켄마에게 어쩌면 친구이상이자 부모와도 같은 존재라고 말할 수 있었다.

켄마를 아는 사람은 쿠로오를 알았고 쿠로오를 아는 사람이라면 켄마를 당연히 알았다. 둘의 세계는 늘 공유하고 있었으니 당연지사였다. 어긋날 때도 있었다. 한 살 차이가 나기 때문에 학교가 갈라질 때를 빼고는 둘의 세계는 동일했다. 아니, 학교가 갈라질 때조차도 둘은 함께였다. 그래서 서로에게 익숙해져버린 나머지, 상대방에 대한 인식이 일반화가 될 우려가 있었다.

공교롭게도 사건이라는 건 시간과 장소 그리고 사람을 가리지 않고 찾아온다. 참 괜찮은 하루였다. 지난번에 샀던 게임을 클리어했고 배구 연습도 요리조리 잘 피해서 힘들지 않게 끝냈다. 켄마로서는 이보다도 무난할 수 없는 하루였다. 켄마는 학교에 갔다가 배구 연습을 하고 체육관 정리를 마친 쿠로오와 함께 집에 가는 것이 일과였다. 익숙함에 기대어 편안함을 느끼고 있을 무렵 서서히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순식간에 쌓아올린 시간이 무색할 정도로 산산조각 나버렸다.

켄마, 사랑.”

석양이 천천히 시야에 찰 무렵 쿠로오가 말했다. 쿠로오의 옆에서 천천히 보조를 맞춰가며 걷던 켄마는 그 목소리에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쿠로오는 다시금 입을 열었다.

친구로서가 아냐.”

그제야 발걸음이 멈춘 켄마는 고개를 들어 쿠로오를 바라봤다.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어째서 다른 이에게 해야 할 말을 그는 나에게 하고 있는 것인가. 무엇을 대답해야 하는 지도 모르겠고 이럴 땐 어떻게 행동해야할지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타들어 갔다. 앞에서 저를 바라보는 쿠로오는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켄마는 수많은 게임의 매뉴얼을 외우고 있었지만 정작 이럴 때 소용이 없었다. 어깨에 멘 가방 끈을 잡고 있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겨우 생각해낸 단어는 미안하다는 흔해빠진 답변. 그래도 켄마는 최대한 용기를 모아 입을 열어 말했다.

...”

사랑해...”

하려던 말은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한 채 그대로 삼켜졌다. 제 소꿉친구가 진심을 다해 고백한다는 것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처음 보는 부끄러움에 찬 얼굴이나 안절부절 못할 때 나오는 버릇인 다른 사람과 눈을 못 마주치는 것. 눈에 보이는 모든 행동들이 그가 뱉은 말은 진심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확실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켄마는 갈등했다.

저기...쿠로...”

켄마도 나와 같은 마음이야?”

뻥긋 하려던 입이 닫혔다. 내 마음은? 켄마는 쿠로오의 질문을 받아 다시 자기 자신의 내면에게 질문 했다. 너의 마음은 어떠니? 침묵을 지키는 마음에 켄마는 당황했다. 내색을 하지 않는 성격임에도 켄마는 호불호가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마음의 저울이 제대로 된 답을 내리지 못 한 것 같았다.

?”

자신의 대답을 채근하는 쿠로오가 이토록 야속할 수가 없었다. 다시 한 번 가만히 생각해 봤다. 두 팔을 벌린 저울의 양 끝에는 각각의 쿠로오와 자신이 앉아 있었다. 무엇이 더 무거울까. 잔인한 저울질이 시작되었다.

기억의 파편들을 헤집어 그의 모습들을 보여줬다. 처음 만나던 날, 같이 비를 쫄딱 맞은 날, 신작 게임을 함께 하던 날, 함께 자던 날, 졸업식에서 울던 날 그리고 배구를 하던 날. 켄마의 모든 기억 속에는 까만 머리의 남자가 동행했다. 너무 자연스러워 그 누구도 그가 켄마의 타인인 것을 느끼지 못했을 정도였다. 켄마 본인조차도 그렇게 느꼈으니. 알고 지낸 후로부터 무엇이든지 같이 했고 같이 느꼈고 같이 성장했다. 이제 켄마라는 사람에게서 쿠로오 테츠로를 빼고는 별 볼거리 없는 껍데기만 남은 나무 같다고 생각했다.

이 사람과 다른 마음을 가지고 지금처럼 살 수 있을까? 저울이 켄마에게 질문했다. 쿠로오는 제 주장이 강한 사람이었다. 남들을 이끄는 것을 좋아했고 뭐든지 앞장서서 행동해야 만족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그나마 성격을 죽여 가며 맞춰주던 사람이 켄마였다. 허나 이 문제는 달라도 한참 다른 문제였다. 그가 원하는 답이 나오지 않을 경우 자칫하면 그를 잃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켄마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사로잡힌 불안에 켄마는 별 생각이 다 들었다.

쿠로오라는 울타리를 잃고 살 수 있을까. 쿠로오라는 사람을 잃고 살 수 있을까. 쿠로오라는 친구를 잃고 살 수 있을까. 켄마는 이 질문에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사실 아니라고 대답하기도 맞다고 대답하기도 모두 확실하지 않았다. 앞에 있는 쿠로오를 보면 같음 마음이라고 말해야 됐지만 엄밀하게 말해서 켄마는 같은 마음이라는 것에 확신이 서지 않았다. 좀처럼 저울이 기울지 않았다. 그러나 답을 내려야 했다.

...아마도...”

떨리는 입술을 움직여 간신히 말했다. 어쩌면 간절한 쿠로오의 눈빛에 흔들렸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같다...고 생각해...”

끝내 눈은 마주칠 수 없었다. 쿠로오가 자신을 어떻게 바라볼지 너무나 잘 알기에 그를 제대로 마주할 자신이 없어 그의 발끝만 바라봤다. 배가 살살 아파왔다. 신경을 쓴 탓일까. 그러나 곧 제 손을 담뿍 잡아오는 쿠로오의 커다란 손에 모든 잡념들이 눈 녹듯이 사라졌다.

고마워!!! 역시 켄마도 나랑 같은 마음이었어.”

그렇게 말하고 활짝 웃는 쿠로오는 아주 어렸을 때, 처음으로 해맑게 웃어주던 어린 꼬마 쿠로오의 모습과 아주 닮아보였다. 켄마는 그 뒤에 펼쳐지는 풍경에 그리운 느낌을 받았다. 찬란했던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어렸을 적의 모습이 가슴 먹먹하도록 그려졌다. 왜 그럴까. 더는 하지 않아도 될 질문을 마지막으로 자신을 안아오는 쿠로오에게 몸을 맡겼다. 익숙하디 익숙한 체향에 켄마는 눈을 감았다. 이거면 됐어.

 



켄마는 힘에 부쳤다. 그를 잃기 싫어서 마음속으로 내린 결론으로 인해 점점 지쳐만 갔다. 켄마는 그의 사랑에 보답은커녕 응해줄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쿠로오를 싫어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쿠로오를 생각하면 좋다라는 감정이 확 하고 떠올랐다. 사랑은? 그 질문엔 대답을 할 수 없었다. 좋아한다와 사랑한다의 정의는 달랐다.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켄마는 하나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쿠로오 테츠로를 사랑하지 않았다.

가슴이 아팠다. 그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이 켄마를 아프게 만들었다. 왜 자신은 쿠로오를 사랑하지 않는 걸까. 남자대 남자의 문제가 아니었다. 오로지 감정만의 문제였고 켄마만의 문제였다. 누구도 풀어줄 수 없는 혼자만의 숙제. 너무 복잡하게 엉킨 문제의 실타래는 그대로 켄마를 조여 왔고 제대로 된 사고를 유지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한 가지 켄마를 짓누르는 감정은 죄의식이었다. 사랑받고 싶어 하는 쿠로오에게 사랑을 주지 못하는 자신이 미련해보였다. 쿠로오는 여태까지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는데 보조조차 맞추지 못하고 방관하고 있었다. 그의 미안해하는 얼굴도 또 기대했다가 실망하는 얼굴도 모든 게 켄마에게는 감당하기 버거운 죄로 다가왔다. 보답해 줄 수 없는 쪽이 이렇게 힘들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괜찮아?”

안색이 파리한 켄마가 걱정되는지 쿠로오가 조심스럽게 물어봤다. 그 다정함이 켄마의 죄책감을 한층 더 쌓았다. 그리고 영악한 자신에 대해 다시금 실망했다. 이런 쿠로오를 놓치기 싫어서 어린 날의 치기로 그를 옭아맨 것은 아닐까 싶은 마음이 켄마를 피나도록 찔러댔다.

“...

미안...”

쿠로오의 말에 켄마는 시선을 돌려 그를 바라봤다. 울상 짓는 표정도 아닌 다 포기한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면서 자신을 바라보는 쿠로오였다. 그러면서도 자신에 대한 사랑을 채 지워내지도 못해 뒤죽박죽 섞인 감정을 흘려보내는 그는 암담하고도 참담해보였다. 기대에 부흥하지 못한 자신이 또다시 실망스러웠다. 그에게 이런 표정을 짓게 하는 것은 켄마가 원하는 게 아니었다.

미안해 하지마...내가 미안해...”

...”

쿠로가 해준 만큼 못해줘서 미안해...나 조금 느리니깐...”

애써 서툰 변명을, 그를 위로하기 위해 꺼냈다. 사실 켄마 스스로도 울고 싶었다. 처음부터 없었던 일로 하자고 말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다시 돌아가자고 원래 평범했던 우리의 관계로 돌아가자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렇지만 저가 뿌린 씨앗은 잘라낼 수 없을 만큼 탄탄하고 질긴 넝쿨이 되어 켄마와 쿠로오를 휘감았다. 더는 진보하지도 퇴보하지도 않는 뒤틀리고 변형된 관계가 그들을 지배했다.

아직도 그때의 연장선이었다. 달라진 것은 그 어느 것도 없었다. 억지로 하나 만들자면 친구라는 이름을 지워내고 그 자리를 꿰찬 연인이라는 허울뿐인 명칭이었다. 그 때의 상황을 모면하고 싶어서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내린 결과는 마치 나비효과처럼 지금에 와서야 그 무게를 실감하게 했다. 켄마는 좋아하는 그의 뺨에 키스를 했다.

“...조금만 더 기다려줘.”

“...

“......고마워

너라면...”

쿠로오는 켄마를 똑바로 바라보면서 이야기했다.

너라면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좀 전의 미안함과 기대감이 섞인 표정은 사라지고 처음 고백했던 날의 쿠로오가 튀어나왔다. 같은 마음이냐고 질문하던, 켄마를 사랑한다고 온 몸으로 외치던 그 때처럼 흔들림 없는 얼굴의 쿠로오는 자신을 다시 예전의 어리숙한 켄마로 돌려놨다. 너른 품에 자신을 안는 쿠로오에게 몸을 기대면서 켄마는 눈을 감았다.

너와 나. 누가 더 겁쟁이일까.

속마음을 이야기 해보려 시도조차 못 하는 나.

그런 나를 알면서도 사랑하는 너.

엇나가서 더는 돌지 않는 톱니바퀴처럼 삐걱대는 너와 나.

누구의 탓도 누구의 잘못이라 말할 수 없는 관계.

이런 것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그래도 나는 널.

잃어버리고 싶지 않는 너.

나는 널 좋아해.

 

 

 

 

 

 

2016.01.05.

Happy Kuroken-day.

pinn_pond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오이스가] 38  (0) 2016.01.26
[쿠로켄] 37  (0) 2016.01.16
[오이이와] 35  (0) 2016.01.04
[쿠로츠키] 34  (0) 2015.12.31
[리에야쿠] 33  (0) 2015.12.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