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노후타] 39

pinn_pond 2016. 4. 6. 22:34


39

엔노시타 치카라/후타쿠치 켄지

 

 

 

 

엔노시타 치카라는 자신의 몸에 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몇 만분의 일 확률로 나타난다는 다른 이의 이름은 운명적인 상대라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동반했다. 중학교 때, 목 뒤가 유난히 간지러운 날이 있었다.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아 아물기 시작하면 간지럽듯이 그날은 목덜미를 긁지 않으면 못 배기는 지경까지 왔었다. 결국 빨갛게 부어 화끈거리는 목 뒤를 집에 와서 거울로 비춰봤을 때, 그는 들고 있던 손거울을 떨어트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희미했지만 붉은 살 위에는 칼로 새긴 것 같은 모양의 한자가 써져 있었다. 二口. 뒷 글자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앞에 두 글자는 간단한 한자여서 뚜렷이 보였다.

타쿠? 아니 가타카나인가. ?’

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온 상처 같은 이름을 매만져봤다. 얇게 패인 것이 손가락 끝에 오돌토돌 걸리는 게 제법 신기했다. 등을 돌린 채 거울 너머의 이름을 매만지다가 순간 충동을 참지 못하고 글자를 입 안에 굴려 소리로 만들어 바깥으로 토해냈다.

후타쿠…….”

처음으로 엔노시타에 의해 소리를 입은 글자는 그에게 막연한 사랑스러움을 안겨주었다. 토해낸 이름에게 느낀 감정이 생소하다고 여길법했는데 엔노시타는 있는 그대로 그 이름을 받아들였다. 소문을 들은 적은 있었다. 신체 어느 부위에 타인의 이름이 새겨지고 후에 만나게 될 인연의 상대는 이름의 주인이라는 어디 동화에서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이야기를 들었을 때, 엔노시타는 자신과는 전혀 관계가 없을 거라 생각했다. 평범한 삶을 살고 있었고 무에 특별한 것과는 거리가 먼 무난한 인생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잔잔한 수면과도 같은 그의 삶에 작은 물방울 하나가 떨어져 큰 파동을 일으켰다. 단 두 글자의 파급력은 그가 생각한 것 보다 아주 크게 엔노시타에게 다가왔다.

시간이 갈수록 뒤의 글자는 뚜렷해져 온전한 이름의 형태를 갖추었다. 二口 堅治. 켄지. 굳게 다스린다는 뜻을 가진 이름은 뜻 그대로 엔노시타를 다스렸다. 기쁜 일이 있을 때 목덜미를 쓰다듬으면서 이름을 만졌고 슬픈 일이 있을 때면 목덜미를 감싸 쥐며 흐느꼈다. 작은 글자에 불과했으나 어느새 엔노시타에게는 기쁨이자 위안이었으며 전부가 되었다. 이름 하나에 별의별 감정을 느낀다고 비웃을 사람들도 있겠지만 엔노시타에게는 소중하고 어여쁜 이름이었다. 이름이 새겨진 뒤로부터 만나지도 못한 운명의 상대에게 연모의 감정을 품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대상을 찾기 위해 어찌 해보지는 않았다. 말 그대로 운명의 상대인 이상 운명처럼 만나야한다는 게 엔노시타의 지론이었다. 미래에 다가올 운명을 받아들일 준비를 천천히 해나갔다. 그런 엔노시타의 노력이 가상키라도 한 듯 하늘은 그에게 운명을 보여주었다.

고등학교 2학년, 아직 미래에 대해 충분히 생각지 않았을 때 엔노시타는 넓디넓은 현립 체육관에서 운명의 상대이자 제 목덜미에 새겨진 이름의 주인을 만났다. 작년에는 부활동에서 도망갔던 터라 만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운명이란 게 참 아이러니해서 엔노시타를 다시 부활동에 참가하게 만들고 반 년 만에 다시 온 체육관에서 운명을 그의 눈앞에 데려왔다.

제 운명의 상대를 보자마자 엔노시타는 단번에 알아 차렸다. 그가 자신의 운명이라는 걸. 멀리서부터 걸어오는 상대방의 인영부터 엔노시타의 눈길을 잡아챘다. 가까이 다가올수록 점점 뚜렷해지는 그의 모습은 입이 떡 벌어질 정도로 환상 그 자체였다. 초콜릿보다 부드러울 것만 같은 머리카락과 그보다 더욱 뚜렷해 보이는 눈동자. 꽤나 호감형의 모습을 한 그 남자는 누가보기에도 눈길을 빼앗아 갈법한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정갈하게 나뉜 가르마는 그의 반듯한 이마를 깨끗하게 보여줬고 고집스레 꽉 다문 입술은 그가 어떤 성품을 지니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도왔다. 뭐하는 거냐며 같은 학년의 부원이 엔노시타의 팔을 잡아당길 때까지 하염없이 그의 뒷모습을 좇았다. 습관적으로 그리고 의식적으로 엔노시타는 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인연이라는 건 신기하게도 라는 사람을 타인에게로 이끌었다. 엔노시타가 목덜미를 만진 게 허튼 짓은 아니라는 확신을 들게 만든 건 시합을 모두 마치고 학교로 돌아갈 때였다. 시합에서 패배하고 부원 모두가 축 처진 분위기였다. 스포츠백에 옷가지와 수건들을 정리하면서도 엔노시타는 자신을 짓누른 패배의 쓰라린 감정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가방을 왼쪽 어깨에 걸고 대회장을 나가려고 할 때, 누군가가 엔노시타를 불러 세우지 않았더라면 그 흐름에 가만히 흘러 내려갈 수 있었을 터다.

저기

?”

무심코 뒤를 돌아본 순간 엔노시타는 목덜미가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처음 이름이 새겨진 그날보다도 더 따갑고 간지러웠으며 심장은 코트에서 응원할 때보다도 더 크게 뛰었다. 그의 정갈하게 빗겨진 밤갈색 머리카락은 당장이라도 달려가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워보였다. 엔노시타는 제 입이 저절로 벌어지는 것도 모른 채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시원스레 벌어진 그의 입에서는 감미로운 노래와도 같은 말이 나왔다.

안녕하세요, 재작년부터 쭉 봐왔는데 그 쪽 느낌이 너무 좋아서요.”

무슨 말씀이신지…….”

, 뭐라고 해야할까요. 일단은 저랑 사귀실래요?”

……?”

! 제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다테 공업 고등학교 2학년인……

그는 약간 뜸을 들였다.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엔노시타를 바라보며 살짝 웃음이 걸린 입을 열어 말했다.

후타쿠치 켄지라 합니다.”

후타쿠치 켄지.’

후타쿠치가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것과 동시에 엔노시타는 속으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이미 그를 봤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중학교 때부터 자신을 졸졸 쫓아다닌 이름의 주인을 엔노시타는 작은 짐승들이 태어나면서 제 어미에게 각인하듯 후타쿠치를 보자마자 알아챘다. 게다가 운이 좋게도 후타쿠치 쪽에서 먼저 엔노시타에게 호감을 보였다. 이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그와 핸드폰 번호를 교환하면서 엔노시타는 처음으로 자신에게 그의 이름을 각인시켜준 신에게 감사했다.

후타쿠치 켄지…….”

후타쿠치 켄지.”

이보다 더 어렸을 무렵 히라가나인지 가타카나인지 헷갈리며 더듬더듬 이름을 불렀을 때보다 선명하게 인식되었다. 틀리지 않았다. 엔노시타 치카라는 틀리지 않았다. 인연은 그를 이끌었고 제 뒷목에 새겨진 이름 또한 그를 그에게 이끌었다. 패배로 인한 슬픔과 분함의 감정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오로지 이름의 주인을 만나게 되어 환희의 감정이 요동쳤다. 솔직히 말해서 이전의 모든 게 무의미해져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이미 엔노시타의 삶은 그를 만나기 전과 그를 만나고 난 후로 양분되었다.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임에도 그는 벌써 엔노시타의 척도가 되었다.

아마도 운명이니 가능하다는 말로 설명할 수 있다고 여겼다. 운명이니 그의 이름이 목덜미에 발현되었고 운명이었으니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그를 만났다. 마지막으로 운명이었으므로 그가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었고 관계를 진전시킬 수 있는 포문을 열었다고 엔노시타는 생각했다. 여태까지는 감히 스스로 써보지 못했던 그의 이름을 전화번호 저장이라는 빌미를 삼아 조심스럽게 자판을 눌러봤다.

二口 堅治

거울을 들이대지 않으면 볼 수 없었던 이름이 눈앞에 선명히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액정 안에 갇혀있는 이름을 손가락으로 더듬어봤다. 뒷목에 나있는 생채기 같은 표식과는 다르게 맨질맨질 만져지는 느낌이 묘하게 다가왔다. 이름만으로 이토록 사랑스러울 수 있을 까 여겼던 감정들이 이제는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정확하게 정의되었다. 그는 엔노시타가 생각하던 이상의 사람이었다. 어떤 모습이었어도 후타쿠치 켄지라는 사람은 엔노시타에게는 상상이상의 모든 것이었다.

어찌됐든 운명의 접점이 있었던 뒤로 엔노시타는 급속도로 후타쿠치와 깊은 관계가 되었다. 마치 신이 정말로 그들의 사이를 엮으려고 하는 것처럼 평행선을 달리던 그들 사이는 순식간에 한 곳에서 매듭이 지어졌다. 이토록 열렬히 서로를 사랑하는데 어째서 늦게 만났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질문을 서로에게 하면서 키득거렸다.

후타쿠치는 엔노시타 목덜미에 새겨진 제 이름을 보는 걸 좋아했다. 또 엔노시타와 눈을 마주하며 대화를 나누면서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는 걸 좋아했다. 타인의 목에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감상에 대해 후타쿠치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러했다.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이 확실한 형태로 나타난 거야.”

그 말을 들은 엔노시타는 뿌듯했다. 상처와도 같이 새겨진 이름이 사랑스럽고 좋기는 했으나 지금과도 같이 자부심이 드는 건 처음이었다.

 



나한테도 엔노시타의 이름이 새겨졌으면 좋겠어.”

어느 새벽녘에 관계를 마치고 나서 후타쿠치가 천장을 바라보며 작게 이야기했다. 땀에 절여있는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기고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엔노시타는 그런 후타쿠치를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불공평하잖아. 좋아하는 마음은 같은데 엔노시타만 내 이름이 있잖아.”

질투하는 거야?”

? 아 몰라.”

진지하게 얼굴을 찌푸리며 이야기하는 후타쿠치를 보니 엔노시타는 웃음이 나와 버려 킥킥거리면서 후타쿠치에게 말했다. 엔노시타가 자신을 놀린다는 걸 깨달은 후타쿠치는 부끄러운 마음에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 올렸다. 모로 누워 손으로 머리를 지탱하던 엔노시타는 약간 삐진 것처럼 보이는 후타쿠치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하얀 이불 안으로 손을 넣어 그를 간지럽혔다. 간지러움에 몸을 이리저리 튕기던 후타쿠치는 결국 항복을 선언했고 방 안에는 서로 웃는 소리와 사랑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가득 찼다.

엔노시타는 후타쿠치에게 자신의 이름이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그저 자신에게 그의 이름이 계속 새겨져있으면 그것으로 족했다.

변화가 생긴 건 졸업식이 점점 다가오는 1월의 중간쯤이었다. 후타쿠치가 어느 순간부터 손가락을 자꾸 긁기 시작했다. 원래 손에 땀이 많이 차는 체질이라 겨울이어서 장갑을 끼고 다녀 습진이 생긴 건가 했지만 피부 껍질이 벗겨지는 것도 아니었고 손세가 무르는 것도 아니었다. 장갑을 벗고 다녀도 차도가 없었고 되려 간지러움만 심해졌다. 병원에 가도 확실한 답을 받아내지 못해 후타쿠치는 좀처럼 기분이 나아지지 않았다.

혹시 말이야……. 혹시.”

벤치에 앉아 따끈한 캔커피를 마시면서 갑자기 엔노시타가 운을 땠다. 찬바람이 살살 불어왔지만 둘은 잡은 손을 놓지 않고 있었고 엔노시타는 말을 이어가며 잡은 손에 더 힘을 실었다.

너도 각인되는 게 아닐까?”

후타쿠치는 놀란 표정이었다. 그리고는 웃었다. 시리도록 추운 겨울에 후타쿠치는 강렬하게 내리 쬐는 여름의 태양같이 환하게 웃었다. 한참을 웃더니 마주잡은 손을 그대로 들어 올려 엔노시타의 눈높이에 맞추고는 흔들었다.

이제 이 손가락에 네 이름이 있는 거야.”

내 이름, 내 이름. 자신의 이름이 타인에게 그것도 사랑하는 이에게 새겨진다. 돌연 차오르는 벅참이 엔노시타를 지배했다. 두근거리기 시작한 심장은 어느새 자리를 옮겼는지 마주잡은 왼쪽 손으로 이동해 세차게 뛰고 있었다.

어서, 어서 후타쿠치도 자신처럼 이름이 새겨진 뒤 가지게 되는 이름의 주인에 대한 사랑스러움을 느꼈으면 싶었다. 이번엔 제 차례였다. 縁下 力.

후타쿠치는 그 뒤로 손바닥을 펼쳐 바라보는 게 일상이 되었다. 그의 왼손 중지의 옆면에는 약간 벌겋게 부어 보이는, 아직 형체라고 보기 뭐한 벌레에 물린 상처 같이 동그스름하게 올라와 있었다. 가려움이 점점 심해져서 귀찮기는 했지만 엔노시타의 목덜미에 난 것 마냥 제 손가락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진다는 게 신기하기도 하고 새삼스레 부끄럽기도 했다. 그와 엔노시타는 하늘에서 맺어준 인연이 분명했다. 열일곱 해를 살면서 남들과 같이 지극히 평범하던 손가락이 엔노시타를 만나면서 그에게 반응이라도 하듯 몸소 변화를 보여주고 있었다. 후타쿠치는 제 오른손을 들어 왼손을 감싸 가슴께로 끌어안았다. 언젠가 완벽하게 나타날 엔노시타의 이름을 상상하면서 후타쿠치는 더욱 손을 꼭 쥐었다. 저릴 만큼.

 



후타쿠치? 요새 학교 안 나온 지 꽤 됐어.”

일주일 째 되던 날, 엔노시타는 다테 공업 고등학교로 직접 찾아갔다. 전까지만 해도 잘만 주고받았던 메시지가 끊기고 전화 역시 착신이 가지 않아 애가 타던 터였다. 사귄지 몇 달 되지 않았음에도 후타쿠치의 집 근방조차 알지 못한 자신에게 엔노시타는 화가 났다. 결국 최후로 선택한 방법은 후타쿠치의 학교에 찾아가는 거였다. 학생들의 시선이 모조리 자기에게 꽂힌 기분이 들었으나 개의치 않았다.

2학년 교실이 있는 곳을 물어 계단을 올라 갈 때, 전에 후타쿠치와 함께 있었을 때 만난 남학생 한 사람을 발견했다. 급한 마음에 엔노시타는 인사할 새도 없이 그 남자를 붙잡고 후타쿠치의 행방을 물어봤다. 그리고 돌아온 답은 엔노시타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이 곳에서도 허탕을 친 느낌에 무거운 발걸음을 돌리려는 찰나 그 남학생이 짤막하니 덧붙였다.

후타쿠치 집에 가보지 그래?”

집 알아?”

집이라는 말에 엔노시타는 재빨리 남자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방에서 노트를 꺼내 무언가를 휘갈겨 적고는 종이를 찢어 엔노시타에게 주었다. 엔노시타는 그에게 고맙다고 몇 번이고 인사한 뒤, 종이를 손에 꼭 쥐고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제는 달릴 시간이었다. 후타쿠치에게로, 켄지에게로.

하얀 복도가 눈앞에 쭉 펼쳐졌다. 고동색 현관문을 세 개쯤 지나치니 605호라는 표지가 보여 걸음을 멈췄다.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부모님이 나오시면 뭐라고 말하지, 후타쿠치가 많이 아픈 걸까. 엉망으로 엉킨 생각들이 엔노시타가 초인종을 누르는 걸 방해했다. 땀이 차도록 쥐고 있는 쪽의 손을 들어 초인종을 눌렀다. 경쾌한 기계음이 한바탕 적적한 복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후타쿠치의 집에서는 어떠한 인기척도 없었다. 다시 초인종을 눌렀다. 그러나 어떤 반응도 없었다.

, 켄지!”

쾅쾅쾅. 이전과는 사뭇 다른 타격음이 복도에 울려 퍼졌다. 몇 번을 두드려도 굳게 닫힌 현관문은 열릴 줄을 몰랐다. 엔노시타는 입이 바짝바짝 말라왔다. 안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면서도 지금 그가 느끼기에 후타쿠치는 집 안에 있었다. 현관문을 내려친 손이 시뻘겋게 변하거나 말거나 엔노시타는 다급한 마음이 앞서 복도가 울리도록 후타쿠치를 부르며 문을 두들겼다.

켄지, 제발 문 좀 열어줘!!!”

목이 터져라 외쳤다. 배구 시합 도중에도 이처럼 목청껏 소리 지른 적이 없었다. 그만큼 엔노시타는 절박했고 후타쿠치 켄지라는 사람이 그리워 마음에 사무쳤다. 이보다 더 크게 소리가 나오지 않는 목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점점 희뿌옇게 흐려지는 시야와 동시에 힘을 잃어가는 목소리가 엔노시타의 자괴감을 괴롭히고 있을 때 쯤, 거짓말 같게도 굳게 닫혔던 문이 살짝 열렸다.

…….”

현관문에 걸린 체인 때문에 채 다 열리지 못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집 안은 불이 꺼져있는지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고 오직 목소리만 들렸다. 그리고 그 음성의 주인은 후타쿠치였다. 낮게 가라앉은 거 같기도 했고 물기에 젖은 느낌도 났다. 조금 열려있던 문은 무에 그리 급한지 점점 닫혀가고 있었다. 엔노시타는 그 틈 사이로 제 발과 손을 집어넣어 현관문을 붙잡았다.

, 켄지. 어디 많이 아파?”

그런 거 아냐, 괜찮으니깐 가…….”

얼굴만, ? 얼굴만 보고 갈 테니깐 제발 문 좀 열어줘.”

실랑이는 제법 길었다. 괜찮으니 가라는 후타쿠치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고 싶다는 엔노시타. 둘의 줄다리기는 결국 엔노시타의 승리로 막을 내렸다. 문틈에 껴있던 엔노시타의 발이 빠진 뒤, 현관문은 끼익 소리를 내며 닫혔다가 이내 활짝 열렸다. 볼 수 없었던 내부에 빛이 비춰 들어갔고 현관문에 서있는 후타쿠치가 보였다. 엔노시타는 단숨에 그를 껴안아 목덜미에 제 코를 비볐다. 직접 그를 만지니 여지껏 쌓여왔던 불안의 댐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숨 막혀, 치카라.”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잠깐 앉았다 가. 물 줄게, 아까 소리 많이 질렀잖아.”

고마워.”

엔노시타가 집 안에 들어가면서 이곳저곳 살피자, 후타쿠치는 부모님이 출장가셨다며 괜찮다고 그를 거실 소파에 앉혔다. 무거운 공기가 감돌았으나 후타쿠치에게 평소 맡을 수 있는 특유의 향이 엔노시타를 편하게 만들어줬다.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한참 들리더니 제 앞에 남색 머그잔을 들고 있는 후타쿠치가 보였다. 엔노시타는 고맙게 잔을 받아들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한 모금 마셨다. 두어 번 연거푸 마실 동안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가 없었다. 침묵을 깬 건 의외로 후타쿠치였다.

이제 그만 가. 나 정말 괜찮잖아.”

? , .”

이제 더는 고집을 피울 수 없었다. 후타쿠치는 문을 열어줬을 뿐만 아니라 집 안까지 들어와 차를 대접했고 엔노시타가 걱정했던 모습 또한 아니었다. 그의 안정을 확인했으니 더 이상 머무를 이유가 없었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기 전에 엔노시타는 후타쿠치의 모습을 찬찬히 눈에 담았다. 조금은 헬쓱해 보이지만 생기 도는 얼굴과 두 사이즈는 커 보이는 맨투맨과 짧은 반바지를 입고 있었다. 이전과는 사뭇 다른 편안한 모습의 후타쿠치인 거 같아서 엔노시타는 그가 귀엽다고 생각했다. 언제나 봐도 보고 싶었고 보고 있어도 그리웠다. 가슴께가 간질거렸고 목덜미 뒤는 마치 심장이 거기 있는 듯 두근두근 맥박이 널뛰었다.

그래, 이만 갈게. 적어도 메시지에 답장은 해줘, 걱정 되잖아.”

미안……. 이젠 꼭 할게.”

약속!”

엔노시타는 뭔가 딱딱한 분위기를 전환 시키고 싶었다. 못 본 일주일 새에 둘 사이에는 유리벽이라도 생긴 것처럼 거리감이 있어보였다. 어린아이들이 약속할 때 하는 거 같이 왼손을 들고 새끼손가락만 남기고 다 접었다. 그런 엔노시타의 모습에 후타쿠치는 피식 웃음을 흘리고 자신도 역시 왼손을 들어 그의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걸려했다. 두 손이 맞닿았을 때, 후타쿠치는 안될 거라도 본 사람 마냥 화들짝 놀라며 제 손을 옷자락 사이로 감췄다.

켄지?”

, , 그게

유리벽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순식간에 단단한 돌벽으로 바뀌었다. 이해 가지 않는 후타쿠치의 모습에 의문이 하나 둘씩 삐져나왔다. 아프지도 않았으면서 일주일째 학교에 나오지 않은 것도 이상했고 몸에 핏 되는 옷을 좋아하는 후타쿠치가 제 사이즈의 두 배 정도 되어 보이는 옷을 입고 있지 않나, 가장 이상한 건 방금 후타쿠치가 보인 행동이었다. 간단하디 간단한 새끼손가락에 자신의 새끼손가락을 거는 걸 못하고 손을 내린 것은 물론, 손을 옷자락 안으로 넣어 숨겨버리는 엔노시타 입장에서는 수상할 만한 행동거지를 보였다. 이제는 자신을 바라봐주지도 않았다. 불편하다는 기색을 온 몸으로 풍겨내며 엔노시타를 다시 밀어내고 있었다.

뭐 숨겨?”

, ? 아니

끝까지 눈을 안 마주치고 고개를 젓는 모양새가 이상했다. 엔노시타는 한걸음 한걸음 그에게 다가갔다. 그가 다가갈수록 후타쿠치는 뒷걸음질을 쳤다. 이내 베란다문이 후타쿠치 등에 닿았고 꼼짝없이 엔노시타 사이에 갇혔다. 후타쿠치는 눈알을 굴리다가 양 손을 등 뒤로 감췄다. 그 모습은 오히려 엔노시타의 의문이라는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되었다.

손 이리 줘봐.”

그의 요청에 후타쿠치는 입을 다문 채 고개만 저었다. 정말, 숨기는 게 있어보였다. 짚이는 부분은 없는데 분명 자신에게 숨기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 게 분명했다. 알고 싶었다. 대체 어떤 거기에 학교도 안 나가고 자신까지 안 만나 주면서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지 원인을 알고 싶었다. 말로써 설득되지 않는 다면 남은 건 완력이었다. 엔노시타는 후타쿠치의 어깨를 손으로 틀어쥐고 등 뒤로 감춰져 있는 후타쿠치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 다녔다.

그대로 딸려온 그의 손은 맨투맨 아래 가려져 있었다. 제 손을 부여잡는 후타쿠치의 손을 쳐내고 팔꿈치까지 옷을 끌어 올려버렸다. 뽀얗고 단단한 팔은 이상한 점이 없었다. 그렇지만 덜덜 떨리고 있는 후타쿠치의 팔은 그게 아니라는 걸 증명하고 있었다. 제 손 아귀에 잡힌 얼음장처럼 차가운 후타쿠치의 손을 살펴봤다. 창백히 질린 왼손은 주먹을 꽉 쥐고 있어서 마디마디가 하얗게 변했다. 펴보고 싶었다. 뭔가 가슴 한 구석에서는 이제 그만하라고 외쳤지만 몸은 이미 바들바들 떠는 그의 손가락을 하나하나 피고 있었다. 애처롭게 벌어진 손가락은 다시 오므리려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손가락을 폈을 때, 엔노시타는 깨달았다. 후타쿠치가 왜 그랬는지.

다 새겨진 거야?”

부드럽게 묻는 어조가 새삼 집안의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았다. 후타쿠치는 거의 울 거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엔노시타는 이상했다. 왜 후타쿠치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이름이 완벽하게 새겨진 건 축하받아야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도대체 왜 후타쿠치는 일그러진 얼굴을 하고 있을까.

제발 보지마…….”

애원에 가까운 후타쿠치의 말을 가볍게 넘기고 엔노시타는 그의 가운데 손가락을 살펴봤다. 山下 秀明. 야마시타 히데아키. 생경한 사람의 이름이, 제 이름이 아닌 다른 이의 이름이, 제 이름이 있어야 할 곳에 떡 하니 자리를 잡고 있었다. 눈을 몇 번이고 껌뻑여도 후타쿠치의 중지에는 야마시타 히데아키라는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단단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손에 힘이 쭉 빠졌다. 손 새의 모래처럼 후타쿠치의 왼손은 공중에 떨어졌다. 털썩 주저앉아 오열하는 후타쿠치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들려오다 아득하게 멀어졌다. 제대로 사고 회로가 맞춰지지 않았다. 온 몸의 마디가 기름칠 되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삐그덕 거렸다. 오른 손으로 자신의 왼쪽 손가락을 쓸어봤다. 기묘했다. 왼손 중지를 한참 쓰다듬다 이내 손을 들어 제 뺨을 세게 내리쳤다. 살과 살이 거세게 맞부딪히는 소리가 거실을 찢었다. 후타쿠치의 우는 소리는 사라졌다.

엔노시타는 벌겋게 부은 손으로 후타쿠치의 왼손을 잡아 일으켰다. 그리고 품에 다시 안았다. 바르작거리지 않고 가만히 제 품에 기대오는 후타쿠치를 느끼며 엔노시타는 그를 끌고 그의 방이라고 생각되는 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침대 위에 후타쿠치를 눕히고 자신도 그의 오른편에 몸을 뉘었다. 큰 사이즈의 침대가 남자 둘로 가득 찼다.

눈 감아, 켄지.”

왼팔에는 후타쿠치의 머리를 기대게 하고 오른손으로 그의 얼굴을 쓸어 눈을 감게 만들었다. 곧게 뻗은 속눈썹에 입을 맞췄다. 눈을 감은 채 후타쿠치는 입을 열었다. 말을 할 때마다 그의 속눈썹과 눈꺼풀이 미약하게 흔들렸다.

치카라, 있잖아

괜찮아, 지금은 자자. ?”

부드럽게 달래며 엔노시타는 후타쿠치를 재웠다. 여태껏 긴장하고 울었는지 후타쿠치는 얼마가지 않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잠에 빠진 그의 고른 호흡이 엔노시타에게는 마치 기분 좋은 노랫소리로 들렸다. 비교적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쓸었다. 검지에 닿는 후타쿠치의 콧대, 눈가 그리고 얇은 입술. 턱을 따라 굴곡지게 펼쳐진 목과 큰 사이즈의 상의라 얼핏 보이는 쇄골. 모두 엔노시타가 사랑하는 것들이었다. 쇄골을 따라 막힘없이 옆으로 가던 손가락이 그의 왼손에 닿았다.

순간 질투라는 추악한 감정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그에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허락도 없이 불쑥 솟아오른 감정을 엔노시타는 발로 잔인하리만큼 짓이겼다. 저 아래로 떨어진 감정은 검붉은 찌꺼기의 형체를 갖췄다. 괜찮아, 저게 뭔 대수라고. 엔노시타는 찌꺼기에게 말했다. 간단해. 없애면 되는 거야. 나무라기도 하는 거 같기도 하면서 달래는 거 같은 음성이었다. 없애면 더 이상 괴롭히는 일도 없을 거야. 엔노시타의 음성을 들은 찌꺼기는 옆으로 푹 퍼졌는데 얼핏 보면 웃는 모양새 같기도 했다.

조심스럽게 왼팔을 후타쿠치 머리 밑에서 빼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롱도롱 잘도 자는 후타쿠치의 이마에 잘게 입맞춤을 하고 엔노시타는 침대에서 빠져 나왔다. 가는 발걸음이 가벼웠다. 잘라내면 될 거야. 문을 향해, 부엌을 향해 가는 엔노시타의 흥얼거림이 즐겁게만 보였다. 방문고리를 잡아 열려던 엔노시타는 뒤를 돌아 침대에 누워있는 후타쿠치를 바라보고 제 목덜미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사랑해, 켄지.”

 

 

 

 

 

2016.04.06.

for yil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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