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오신] -19

pinn_pond 2016. 3. 8. 20:51


-19

나기사 카오루/이카리 신지

 

 

 

 

최근 들어 신지는 몸이 많이 아팠다. 두통도 자주 왔고 배도 살살 아팠고 무엇보다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단 잠을 드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곤 한 시간 남짓 잠 들었을까, 신지는 갑자기 또렷해지는 정신에 잠이 깨고는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정도 반쯤 헤롱헤롱한 상태가 되어 캠퍼스를 다니자 같은 과의 아스카가 그거 장협착증 아니냐며 걱정 반 핀잔 반섞인 잔소리를 해댔다. 처음엔 장협착증이 무슨 병인지 몰랐으나 인터넷에 검색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서둘러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잡았다. 신지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 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

이카리 신지 님, 3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

스피커에서 들리는 안내 목소리를 듣고 신지는 무거운 몸과 마음을 이끌고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깔끔하고 정갈하게 정돈된 진료실 안에는 안경을 낀 40대 정도 되보이는 남자가 앉아 있었다. 얇은 진료차트와 CT사진을 넘겨보는 의사를 보며 신지는 저도 모르게 침을 크게 삼켰다. 의사는 한참동안 CT사진을 바라보더니 안경 너머로 신지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특별히 이상은 없네요.”

?”

“CT사진을 봐도 위나 장 쪽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럼, 제 증상은 대체…….”

이상이 없다는 의사의 말에 마냥 안도할 수 없는 신지는 재차 의사에게 물었다. 의사는 안경을 벗고 한숨을 길게 내쉬더니 신지에게 대답했다.

제 소견으론 심리적인 문제인거 같습니다.”

심리적인 문제요?”

, 최근 이런 분들이 종종 찾아오시곤 합니다.”

이쪽 계통으로 잘 아는 의사가 있으니 소견서를 써드릴게요. 의사는 신지의 대답도 듣지 않은 채 진료차트에 뭐라 뭐라 휘갈겨 쓰고는 신지에게 건네주었다.

신경과는 이 건물 끝 3층에 있습니다.”

연두색 팔랑거리는 진료차트를 들고 의사에게 인사하고 나올 때까지 신지는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래도 의사가 하는 말이니 일리는 있겠지 하며 소독약과 방향제 냄새가 뒤섞인 병원 복도를 천천히 걸어갔다.

 

이카리 신지 님, 이쪽으로 오세요.”

내과와는 다르게 신경과는 직접 간호사가 진료실 안쪽으로 안내해줬다. 초조한 마음이 들어 자꾸만 몸에 힘이 들어가 왼쪽 손에 들린 진료차트는 이미 꾸깃꾸깃 해져 있었다. 진료실 안은 바깥과는 다르게 은은한 라벤더 향이 났다. 창살 너머로 비추는 햇살과 라벤더 향이 신지의 긴장된 몸을 살살 달래며 풀어주었다. 작은 의자에 앉아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는 소리가 들릴 때까지 신지는 자신이 무엇 때문에 이곳에 왔는지 모를 정도로 오랜만에 긴장을 풀었다.

이카리 신지 씨?”

, ?”

앞에서 들려오는 음성에 화들짝 놀란 신지는 멍한 표정을 급히 교정하고 제 앞에 있는 의사를 바라봤다. 뒤에서부터 비쳐오는 햇살을 받은 은발은 수면 위에서 잔잔하게 부셔지는 햇살처럼 눈이 부시기 그지 없었다. 부드럽게 느껴지는 붉은색의 눈과 약간의 미소와 상냥함을 머금은 입술은 신지마저 살짝 입꼬리를 올리게 만들었다. 하얀 가운과 너무나도 잘어울리는 의사는 가슴께에 명찰을 달고 있었다.

나기사 카오루

신지는 속으로 의사의 이름을 불러봤다. 평소라면 눈이 가지도 않았을테고 신경조차 쓰지 않았을 의사의 이름이었는데 묘하게도 자꾸 신지의 머릿속에 멤돌았다. 의사는 신지가 건넨 진료차트를 쭉 훑어보고 내려놓더니 자연스럽게 양 손에 깍지를 끼고 신지를 지그시 바라봤다. 생경한 의사의 모습에 신지는 당황스러워서 자신도 모르게 손가락을 꼼지락댔다.

요새 어떻게 지내요?” 

누가 들으면 의사와 구면이냐고 물을 정도로 다정하고도 친근한 음색이었다. 그렇다고 대뜸 어떻게 지내냐니, 신지는 무어라 대답해야할지 한참을 고민하다 겨우겨우 의사의 말에 대답했다.

, 잠을 잘 못자고 여기저기 아파요. 특히 두통이 심해요.”

다른 이가 물어봤다면 거짓으로 괜찮다고 말했을 터인데 의사에게는 그리고 이 의사에게는 진실하게 말해야할 것만 같았다.

잠을 잘 못 잔 다라. 최근 뭐가 가장 이카리 군을 힘들게 하나요?”

이카리 군. 신지는 다정스레 자신의 성을 부르는 의사가 그리 싫지는 않았다. 꼼지락대던 손을 꽉 붙잡고 다시금 말을 이었다.

아무래도 학교가 아닐까 싶은데 과제도 많고 성적도 내야하니깐…….”

그런가요

의사는, 카오루는 신지의 증상을 들으면서도 어떠한 기록도 진료차트에 쓰지 않았다. 그저 신지와 눈을 맞추며 신지가 이야기하도록 유도하고 있을 뿐이었다. 크리스마스의 난롯불처럼 그리고 언젠가 엄마와 함께 들고 갔던 축제의 등불처럼 카오루의 붉은색 눈동자는 신지를 따뜻하게 해줬다.

그리고 사람들……. 또 아버지와 문제들…….”

뒤 이어 나온 말에 신지는 아차 싶어 입을 꾹 다물었다. 내리 감았던 눈을 살짝 들어 카오루를 바라보니 처음처럼 살짝 입가에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어째서 아버지 이야기를 이렇게 쉽게 이 사람 앞에서 꺼낸 거지. 신지는 우물쭈물 거리며 아무 말도 하고 있지 못할 때, 갑자기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피가 안통하도록 꼭 쥐고 있어 하얗게 질린 제 손 위에 하얀 손 하나가 포개졌다.

괜찮아요, 이카리 군.”

그 한마디에 신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괜찮다. 누구도 해주지 않았고 스스로에게도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아버지의 냉기어린 시선과 동기들의 따가운 질투의 시선, 그만큼 남들에게 밉보이지도 잘 보이지도 않아야겠다는 양날의 생각 때문에 쉴 새 없이 스스로를 채찍질하던 지난 과거들이 와르르르 무너져버렸다. 울컥거리며 주체할 수 없이 나오는 감정은 신지의 눈물이라는 결정체를 통해 세상 밖으로 토해내졌다. 울음소리 하나 없이 속 안으로 삼키며 손 위로 느껴지는 다른 이의 온기에 기대 위로라는 감정을 받아들여 여태껏 자신을 괴롭히던 모든 걸 내려놓았다.

한참동안 눈물을 흘려보내고 카오루가 건네주는 티슈로 벌게진 눈가와 뺨을 닦았다. 후련한 마음과 부끄러운 마음이 교차돼 신지는 잡힌 손을 살짝 꼬물댔다.

이제 괜찮으신가요?”

, . , 감사합니다.”

카오루와는 눈도 못 마주치고 이마가 손에 닿을 듯 앉은 채로 최대한 허리를 숙여 그에게 감사의 인사를 보냈다. 마음이 만져지고 남에게 위로받는다는 걸 처음 알고 느꼈다. 아직도 잡혀있어 그대로 느껴지는 카오루의 체온 덕에 신지는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다. 낯선 이와의 접촉을 이토록 길게 하지 않는 신지이기에 서둘러 자리에 일어나 진료실을 빠져나가려했다. 그러나 붙잡힌 손은 쉽사리 신지를 놔주지 않았다.

, 이만…….”

이카리 군.”

?”

한 사람은 앉은 채로 손을 붙들고 있었고 다른 한 사람은 선 채로 손을 놓으려하는 기묘한 자세가 되었다. 허공에서 아슬아슬하게 잡힌, 잡고있는 두 손은 그들의 관계만큼이나 낯설었고 위태로워 보였다. 신지는 카오루가 허술하게 잡고 있는 제 손을 꽉 고쳐 잡는 게 느껴졌다. 화아아악. 신지의 얼굴에 심장이 있는 것처럼 벌게지고 세차게 뛰었다. 그런 신지를 카오루는 뒤편에 비치는 햇살 아니 그보다 더 화사하고 포근하게 미소를 지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오늘 저녁 식사 같이 하실래요?”

 

 

 

 

 

 

2016.03.08.

for d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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