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야쿠] -20

pinn_pond 2016. 4. 6. 14:12


-20

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의 어느 날, 리에프와 야쿠는 헤어졌다.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당연한 수순인 마냥 둘은 그 이후에는 남남인 것처럼 행동했다. 나풀나풀 떨어져 거리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벚꽃 잎을 볼 때마다 리에프는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꼈다. 당연할 거라 생각했던 감정은 의외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적응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꺼라 리에프는 생각했다.

삼사년 정도 야쿠와 연애를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서로 볼 거 다보고 할 거 다 한 사이라 부끄러움도 새로움도 없을 관계였다. 사랑의 설렘이라는 유통기한이 끝난 연인들의 말로는 자연스럽게 헤어짐으로 연결됐다. 그래서 그 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사귀면서 이제는 어느 정도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리에프는 벚나무 아래에 서있는 야쿠를 봤을 때, 그가 자신에 대한 마음을 정리했다는 걸 깨달았다. 헤어지자는 말을 그 누구도 입에 담지 않았지만 리에프는 둘 사이의 끝이 확실히 보였다.

리에프는 타고난 체격으로 인해 특정 스포츠에 흥미를 가지게 되더라도 그에겐 너무나 쉬워 이내 그 열기가 빠르게 식곤 했다. 자신이 인연의 끈을 잡고 있다 하더라도 야쿠가 자신에 대한 애정이 식는다면 리에프가 여태까지 흥미를 잃어왔던 스포츠와 같은 취급을 받을게 불 보듯 뻔했다. 그래서 리에프는 야쿠의 시선과 생각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혼자인 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 전만 하더라도 의식하지 않았던 부분들이 크게 확대되어 다가왔다. 가령 밥을 먹을 때나 거리를 걸을 때나 배구 경기를 볼 때, 무엇보다도 잠들기 전이 가장 익숙하지 않았다. 핸드폰에 있는 노래를 틀었다. 커튼 사이로 비추는 은은한 가로등과 침묵만이 뒤범벅되어있던 작은 방에 잔잔한 노래가 비집고 들어왔다.

베개 위에서 한참을 움직이던 은색 머리칼이 움직임을 멈췄다. 잠든 건 아니었다. 흘러나오는 음악은 야쿠가 평소에 즐겨듣던 재즈 음악이었다. 리에프는 숨을 멈추고 집중되지 않는 노래를 들으려 애썼다. 이불 안의 몸은 새우처럼 점점 둥글게 말아졌다. 사소한 부분마저 야쿠의 흔적들이 묻어나왔다.

어떻게 잠 들었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아마도 꿈에서도 기묘한 재즈음악이 들렸던 것만 어슴푸레 짐작할 뿐이었다. 찜찜한 기분을 잊고자 화장실로 걸어갔다. 칫솔을 들어 치약을 짜다 문득 거울 앞의 노란 칫솔을 봤다. 두 개의 칫솔, 하나의 사람. 도무지 집에 있을 수 없어서 도망치듯 밖으로 뛰쳐나왔다.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새벽 공기가 리에프의 미묘하게나마 남아있는 몽롱함을 지워줬다. 후회는 늦었다고 읊조렸다. 그러나 마음 속 한편은 기어코 그 말을 부정했다.

습관적으로 두 잔을 주문했다. 녹차라떼와 아메리카노. 맛도 없는 녹차를 왜 먹냐고 자신이 핀잔주면 초록색이 참 예뻐라고 말하며 두 눈을 맞춰오는 모랫빛 눈망울이 생각나 애꿎은 아메리카노를 밀어 놓고 녹차라떼를 마셨다.

참 달았다. 달았는데, 썼다. 썼는데, 달았다. 교묘한 이분법적 사고가 자신의 마음과도 닮아 보여 리에프는 머리를 내저었다. 구차해지긴 싫었다. 구차해진 싫었지만 비참해지고 싶지 않았다. 비참해지고 싶진 않았지만 그를 다시 보고 싶었다. 보러가자면 보러갈 수 있었다.

헤어졌다 정의 내린지 오래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직까지 야쿠의 거처를 알았고 야쿠의 번호가 리에프의 휴대폰에 남아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용기가 없었다. 다시 시작할, 시도해 볼. 얼마 먹지 못한 녹차라떼를 들고 카페를 나섰다. 정오의 햇살은 봄이 무색하게도 뜨거웠다. 녹차라떼를 한 모금 마셨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제 발걸음을 보며 보도블록을 따라 걸었다. 한참을 걷고 걷고 또 걸었다. 리에프의 걸음이 멈춘 건 슬슬 아래를 바라보던 고개가 아팠을 때였다. 녹차라떼의 휘핑 위로 벚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하얗기도 하고 분홍빛이 돌기도 한 작은 꽃잎은 원래 그 자리에 있던 것 마냥 자연스러웠다. 그대로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봤다.

흐드러지게 피었던 전날의 벚나무는 어디가고 반쯤은 해성해진 벚나무만 남아있었다. 그리고 그 아래 그가 있었다. 해변의 모래처럼 따뜻하고도 눈이 부신 머리칼을 가진 그 사람이, 야쿠가 서있었다.

벚나무를 바라보고 있는 그는 귀에 이어폰을 꼽고 있었다. 전이라면 다가가느라 급해 자세히 보지 못했을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작은 체구지만 다부진 몸과 동그란 이마, 무엇보다도 좋은 말과 사랑을 속삭여주던 입 그리고 초록색이 좋다며 언제나 맞춰오던 햇살 같은 눈동자.

당장이라도 달려가 껴안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다. 헤어졌다는 사실이 무색할 정도로 리에프는 야쿠를 원했다. 이토록 그에게 미련을 가질 줄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야쿠상. 입 밖으로 미처 나오지 못해 퍼석거리며 메마른 이름이 목구멍을 긁었다.

한심한 모습을 보이기 싫어 뒤돌아 가려 할 때, 가지런한 정수리가 사라지고 자신을 바라보는 야쿠의 얼굴이 있었다. 순간 숨이 턱하니 막혔다. 마치 리에프와 야쿠 둘만 있는 것같이 느껴졌다.

서로 마주보는 둘, 흩날리는 벚꽃잎. 어제와 유사했으나 절대 같지 않은 상황이 리에프를 집어 삼켰다. 그리고 이번엔 리에프는 야쿠의 눈을 봐도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다가가지도 못하고 멀어지지도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을 때, 야쿠가 한걸음 한걸음 다가왔다.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야쿠는 엷게 웃으며 눈을 깜빡였다. 리에프는 그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리에프. 야쿠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 야쿠상. 제 목소리는 볼품없이 갈라졌다. 음료로 목을 축였음에도 며칠은 물을 못 마신 사람처럼 메말랐다.

짧은 침묵 뒤로 야쿠의 말이 따라왔다. 다시 시작할래? 작은 입에서 소리가 났다. 울컥하니 눈가가 뜨거워졌다. ……. 볼품없는 대답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사실 헤어지자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 리에프는 야쿠의 말이 이해가지 않았다. 무슨 말씀이세요. 야쿠는 눈을 살짝 감았다 뜨며 말을 이었다.

너에 대한 생각을 정리한 거지 마음을 정리한 게 아냐. 리에프는 더욱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야쿠는 살짝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생각을 정리하고 너를 보니까 상처받은 표정을 하고 있더라고. 순식간이여서 아닌가 싶었지만. 네가 떠나는 모습을 봤음에도 붙잡지 않은 건, 두려움 때문이었어. 잡아봤자 소용없을 수도 있고 이 연애의 끝이 보인 걸 수도 있고 어긋남의 시작이 지금일 수도 있었으니깐. 그래서 안 좋은 꼴 보기 전에 헤어지자 생각했지. 그런데 온통 네 생각뿐이더라고. 심지어 잘 때 네가 좋아하는 팝송이 나오더라고. 괜찮을 거라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그래서 걷다가 보니 여기였어. 리에프는 뒷말을 더는 듣지 않았다.

아니 들을 수 없었다. 야쿠를 한 품에 껴안는 바람에 더 이상 말 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한숨에 들어오는 야쿠의 향기는 리에프를 살살살 달래주었다. 사랑해요, 야쿠상. 팔에 힘을 더 주면서 리에프가 야쿠의 귓가에 나지막이 속삭였다.

어째서 이 사람의 마음을 곡해 여겼던 것일까. 아직은 나약한 제 마음 탓이겠거니 리에프는 생각했다. 아무렴 어떤가. 다시 그를 만났으니 충분했다. 몸을 움직여 리에프와 자신 사이에 살짝 공간을 만든 야쿠는 오른팔을 들어 이어폰 한 쪽을 리에프에게 내밀었다. 아직까지 음악이 나오는지 이어폰 새로 소리가 새어나왔다.

같이 들을래? 야쿠가 리에프에게 물었다. 기꺼이. 리에프는 자신의 초록색 눈동자를 야쿠의 모랫빛 눈동자와 맞추며 대답했다. 야쿠와 연결된 이어폰을 따라 잔잔한 재즈음악이 흘렀다. 어느덧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2016.03.27.

pinn_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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