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사와] -21

pinn_pond 2016. 5. 27. 00:07


-21

미유키 카즈야/사와무라 에이준

 

 

 

 

이쪽은 주니치의 사와무라 에이준. , 알고 있을 텐데 괜히 말했군.”

감독 옆에 정자세를 하고 서 있는 사람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마 재팬시리즈에서 마지막 리드를 할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미유키 카즈야는 프로였다. 공과 사는 완벽히 구분할 줄 알았으며 그 신념이 기반이 되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점점 빨리 뛰는 심박 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속으로 숨을 여러 번 삼키며 감독이 하는 말을 경청하려 노력했다.

둘은 고등학교 때 배터리를 짜봤으니깐 다른 사람보단 편할 거야.”

감독이 뭐라 말하든 사와무라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배터리. 국가대표를 달고 누군가와 배터리를 짜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 줄은 몰랐다. 물론 국가대표 엔트리에 그가 올라와 있는 것을 보고 아무렇지 않았다고 말한다면 거짓이었다. 바스락 소리를 내며 제 손안에서 구겨진 채 접혀있던 엔트리 종이 안에 적혀있는 이름을 잊지 못했다.

제 말을 모두 마친 감독은 다년간 스윙 연습으로 다져진 굳은 살 박힌 손을 들어 미유키의 어깨를 턱 짚었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무게 중심이 왼쪽 어깨로 쏠렸다. 한쪽으로 기우뚱 해진 미유키의 몸에 감독은 얼굴을 바짝 대어 귓가에 속삭였다.

히든카드 같은 마무리 투수야. 자네를 믿네.’

소속 되어 있는 팀의 감독이자 국가대표를 달게 해준 감독의 말은 상당히 무게감이 있었다. 미유키는 고개를 끄덕였다. 밑바닥에는 지저분하게 금이 가있는 시멘트 바닥이 보였다.

애매한 침묵이 묘한 기류를 형성하는 것을 이미 이 자리에 없는 감독 탓을 할 순 없었다. 몇 년일까. 미유키는 곰곰이 생각해봤다. 하나 둘 셋. 숫자 세기를 그만 뒀다. 이제 와서 횟수를 헤아린 들 비어있는 시간을 메꿀 수는 없었다. 눈을 들어 그를 바라봤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그는 예전과 다른 듯 비슷해보였다. 그때보다 키는 좀 더 자랐고 체격도 제법 투수답게 다부져보였다. 그렇지만 야구모자 아래로 보이는 얼굴은 풋내 나던 여름과 다를 바 없었다.

다행이었다. 미유키는 순간적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안도감을 느낀 자신에게 소스라치게 놀랐다. 무엇을 대체 안도했단 말인가. 사와무라의 얼굴이 그 때와 진배없어서 일까, 아니면 당장이라도 뺨을 올려붙일 줄 알았으나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에 대한 안도일까. 같잖다고 느낄만한 생각들이 경기 뒤의 더그아웃만큼 어지럽혀져 있었다. 미유키는 숨을 들이 마시고 몸에 힘을 잔뜩 준 뒤 평소와 같은 표정을 꾸며내려 애쓰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다, 사와무라 에이준.”

껄끄러운 사이라 생각한 건 자신뿐이었나 하는 의구심이 미유키는 들었다. 자세를 잡고 앉아 있으면 미트 안으로 정확하게 공이 들어왔다. 고등학교 때와는 다른 제구력과 공에 실린 힘이 느껴져서 처음엔 제가 아는 사와무라 에이준이 맞나 싶었다. 그러나 그와 자신 사이에는 메꿀 수 없는 크나 큰 간격이 존재했다. 자신이 프로에 입단하고 커리어를 쌓은 만큼 사와무라도 그랬을 터였다.

투박하게 내리 꽂았던 형편없던 제구력은 4분할에 근접하게 발전한 것처럼 보였고 이전보다 10km는 더 나오는 속력에 미유키는 마스크 안에서 낮게 휘파람을 불었다. 이제 사와무라는 어디 내놓아도 손색없는 좌완 투수가 되어있었다. 사와무라는 고등학교 때 익혔던 체인지업은 물론 슬라이더와 커브까지 자유자제로 구사했다. 백이면 백, 미유키가 자리 잡고 있는 미트에 정확하게 공이 들어갔다. 주변의 다른 선수들은 그의 투구를 보며 박수를 쳤다.

연습경기마다 세이브를 따내는 사와무라를 볼 때마다 미유키는 속이 울렁거렸다. 사와무라는 마운드에서 미유키와 호흡을 맞출 때도 있었지만 다른 포수와 함께 할 때도 있었다. 뒤틀렸다. 더그아웃에서 동료들의 칭찬을 받는 사와무라를 보면 삐걱거리는 녹슨 자전거처럼 몸이 제 말을 듣지 않았다. 탈삼진 5. 마지막 구회까지 멋지게 틀어막은 사와무라는 동료들 사이에서 웃고 있었다. 어째서. 미유키는 몸을 숙여 보호구를 하나하나 풀었다. 오늘은 남은 연습이고 뭐고 침대에 누워서 쉬고 싶었다.

 

 


경기로 누적된 피로를 단숨에 끌어안고 침대 위에 눕자마자 생각 난 건 너였다. 사와무라 에이준. 내가 벌린 너와의 간격이 나를 이토록 힘들게 할 줄은 몰랐다. 나는 너에게 다가갈 수 없었고, 나는 너에게서 멀어질 수 없었다. 내가 버렸던 감정들이 끔찍하게도 몸을 타고 다시 올라왔다. 어렸기에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변명은 차마 부끄러워 입에 올리지 못했다.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나를 위해 너를 져버렸다. 내 스스로 더 높은 곳을 올라가기 위해 여태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재빠르게 계산을 했고 고만고만하던 감정을 지닌 채 관계를 이어나가던 너는 나에게 그리 비중이 큰 사람이 아니었다. 그랬기에 미련 없이 너를 밀어냈다. 다시 생각해달라는 절규에 가까운 너의 음성을 들으면서도 요지부동이었던 나를 너는 어떤 눈빛으로 바라봤을까. 궁금해 하지도 않았던 과거의 파편들이 예리하게 벼려진 날붙이처럼 날아와 내 몸에 박혔다. 쓰라린 감정들이 줄줄이 새어나갔다. 너는 이 감정을 그때 느꼈을 테지.

손에 있는 야구공을 공중 위로 던졌다 받았다. . 야구공이 손바닥에 박히듯 착지했다. 그 후로 너는 어떤 마음으로 야구를 했을까. 나에게 공을 받아달라며 해사하게 웃는 네가 떠올랐다. 나에게 야구가 소중한 만큼 너에게도 야구는 소중했을 것이다. 그래, 에이준. 너 역시 야구를 사랑하는 남자였다. 오늘 정확하게 미트 안으로 빨려들어 오듯 안착한 변화구를 생각했다. 나날이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너. 내가 없어지고 나서야 너는 국가대표에 뽑힐 만한 투수가 되었다. 제구력도 자세도 정신력도, 모든 면에서 성숙해졌다. 길 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3년의 시간동안 나는 대체 너에게 무엇을 해주는 포수였단 말인가. 내 앞에서 너는 늘 제자리 걸음만 하는 소년이었다. 아마도 난 너를 새장에 가두고 있던 거였겠지. 나는 너에게 사랑에서도 야구에서도 모두 최악인 사람임에 분명했다.

난 다시 널 사랑하게 된 걸까? 이 물음에는 명쾌하게 답이 내려지지 않았다. 사랑, 지금 시점에서는 어울리지 않는 유치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단 하나 확실하게 정의 내릴 수 있는 건, 나는 너에게 흔들리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사랑이든 아니든 나는 사와무라 에이준, 너라는 사람에게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처럼 흔들렸다.

설령 내가 너를 사랑한다 하더라도 너를 잡진 않기로 했다. 나는 너를 위로 올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나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버겁고 견디기 힘들어서 이전과 같이 너를 구겨서 새장에 처박아 놓게 될 것이 자명했다. 나를 흔들고 있는 이 생각과 감정들은 시간 속에 무뎌지겠지. 너처럼 해보기로 했다. 야구를 하면서 너를 다시 잊어보기로 했다. 뜨거웠던 여름처럼 힘을 실어 공을 던지는 너를 한 손으로 받아내면서 내 안에 움트고 있는 너를 하나하나 지워가기로 했다.

고생많으셨슴다, 미유키 카즈야.’

눈을 감으려던 찰나, 졸업식이 끝나고 마지막으로 내 이름이 적힌 야구부의 라커룸을 닫으니 이내 뒤에서 들려온 네 목소리가 과거로부터 흘러나왔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2016.05.27.

for da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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