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에야쿠] -23

pinn_pond 2016. 8. 8. 23:48


-23

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오늘도 여기서 자는 거야?”

마지막 비품을 창고에 집어넣으면서 쿠로오가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살코기를 자르던 야쿠는 쿠로오의 질문에 돌아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대답했다.

.”

숭덩숭덩 썰린 고기는 lev라고 써진 원형 스테인리스 그릇에 한 조각씩 담겼다. 꽤나 수북이 쌓인 고기 위로는 아이보리색의 가루가 눈처럼 뿌려져있었다. 야쿠는 핏물이 흥건한 도마와 칼을 설거지하고 다른 스테인리스 그릇에 물을 담아 나무 판에 끼웠다. 오른쪽에는 빨간 고기가 담겨 있었고 반대쪽에는 찰랑찰랑 물이 담겨있었다.

근데 진짜 힘이 넘치더라.”

그러게 말이야. 그런 사자는 처음 봤다니깐?”

오늘 너 대신 놀아주는데 내가다 진이 빠졌어. 켄마랑은 비교도 안 된다.”

켄마는 너무 조용하고 걔는 너무 활발해서 탈이야.”

호랑이 사육장 한 쪽에서 발견된 새끼 고양이 켄마를 생각하며 쿠로오가 말했다. 다행히도 빈 사육장이라서 켄마는 무사히 구조될 수 있었다. 어디 딱히 맡길 곳도 없었고 고양잇과 동물을 사육하고 있는 곳이라 쿠로오가 성체가 될 때까지 기르기로 한 고양이었다.

이크, 늦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본 쿠로오는 시간이 늦음을 깨닫고 서둘러 작업복을 벗었다. 이리저리 구겨진 작업복은 행거 위에 아무렇게나 걸렸고 쿠로오는 그러던지 말던지 신발장에 있는 운동화를 꺼내 구겨 신었다.

먼저 가본다, 당직 잘하고.”

쿠로오의 말에 야쿠는 알았다는 몸짓으로 허공에서 손을 휘저었다. 어디선가 문이 박박 긁히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도 늦은 건 마찬가지였다.

문을 닫으려는 찰나 쿠로오가 다시 방 안쪽으로 상반신 반절을 집어넣었다.

미리 생일 축하해.”

말이 끝나기 무섭게 문이 닫히고 야쿠는 쿠로오의 말에 피식 웃음을 흘렸다. 생일은 무슨. 사육사가 된 뒤로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진 야쿠는 자연스럽게 생일을 챙기지 않게 되었다. 어렸을 땐 죽어라 기다리던 생일이 이제는 평소와 똑같은 날일뿐 특별하다고 여겨지지 않았다. 쿠로오 녀석, 생긴 건 안 그래서 쓸데없이 섬세하다니깐. 고양이를 기르게 된 후로 SNS에 고양이 사진을 듬뿍 올리는 그를 생각하며 야쿠는 꽤 유쾌하게 미소 지었다.

탁탁

긁는 소리는 어느덧 부딪히는 소리로 바뀌었다. 야쿠는 선반 위에 있는 그릇 두 개를 들고 핀잔 섞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조심이라는 팻말이 붙인 문 쪽으로 걸어갔다.

알았어, 간다고!”

 



큰 개만한 어린 사자는 야쿠가 내려놓은 그릇에 고개를 박고서 허겁지겁 고기를 먹고 있었다. 많이 배가 고팠는지 먹는 내내 한 번도 머리를 들지 않은 채 맛깔나게도 먹었다. 야쿠는 그런 사자를 귀엽다는 듯 한쪽 손으로 턱을 괴고 한발짝 물러서서 지켜봤다. 아직 갈기가 나지 않은 머리통은 몸에 비해 아금박스럽게 보였다. 야쿠는 손을 뻗어 귀여워 보이는 뒤통수를 손가락으로 살살 긁어줬다. 야쿠의 손길이 기분 좋은지 사자는 고기를 먹으면서도 그릉그릉 울림소리를 냈다.

맛있어?”

대답할리 없다는 걸 알지만 야쿠는 사자에게 물었다. 사육사가 되고 나서 이렇게 밤에 혼자 남아 동물과 단 둘이 있는 상황이 많았다. 처음엔 괜찮았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외롭고 심심해졌다. 그래서 야쿠는 동물들에게 혼잣말 같은 말을 걸기 시작했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가끔 알아듣는 것처럼 눈을 반짝이는 동물들을 볼 때면 야쿠는 신이 나서 더 말을 붙였다. 정성들여 만든비록 고기를 조각조각 나눈 것밖엔 하지 않았지만저녁을 이렇게 맛있게 먹는 사자를 보며 야쿠는 기특함을 느꼈다. 어렸을 때, 밥을 남기지 않고 다 먹으면 꼭 칭찬해주는 엄마가 생각이나 코끝이 찡해졌다.

요새 꽤 더워져서 영양 보충 좀 해야 할 거 같다.”

일반적인 성장 속도보다 빠르게 자라나는 사자를 보면 영양 보충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았다. 쿠로오가 들었으면 분명 코웃음을 쳤을 거다. 그럼에도 야쿠는 어미랑 일찍이 떨어진 이 아기 사자가 안쓰러웠다.

다음엔 리에프가 좋아하는 소고기로 해줄게.”

야쿠의 말에 아까까지만 해도 정신없이 저녁을 먹던 리에프라 불린 사자가 얼굴을 들어 야쿠를 빤히 바라봤다. 새끼 특유의 초롱초롱함이 담긴 녹색의 눈동자와 마주쳤을 때, 야쿠는 제가 본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자는 끄덕였다.

눈을 여러번 끔뻑였다. 분명 사자는 야쿠의 말에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야쿠는 양 손으로 눈을 비비고 허벅지를 살짝 꼬집었다. 아팠다. 고로 꿈이 아니었다. 혼란이 가득한 머릿속을 정돈하기 위해 다시 사자를 봤지만 마치 사자는 꿈이라는 듯이 다시 하얀 머리통을 그릇에 박고 얼마 남지 않은 고기를 맛깔나게 먹고 있었다.

아무래도 피로가 많이 누적돼서 헛것을 본거라 야쿠는 결론지었다. 리에프를 처음 키우고 나서부터 사자는 자신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지겠거니 하며 집에 가지 않고 사육장 안에서 사자와 동거한지 한 달이 넘어가고 있었다. 도중에 몸이 너무 피곤해서 격일로 하려 했으나 자신과 떨어지기 싫어 구슬피 우는 사자를 외면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태어나자마자 어미에게 버려진 새끼 사자를 자신마저 버릴 수는 없었다.

오늘도 깨끗하게 비웠네, 착하다 리에프.”

한톨도 남기지 않고 저녁을 깨끗하게 비운 사자를 야쿠는 아낌없이 칭찬해주었다. 옆에 있는 물을 혀로 할짝이며 마시는 사자의 엉덩이를 두어 번 팡팡 쳐주었다. 야쿠의 손길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아니면 배가 불러 만족하는지 사자는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이리와, 리에프.”

야쿠는 입가 주변에 물이 뚝뚝 떨어지는 사자를 불러 손으로 입을 한번 쓸어주었다. 제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자를 손으로 툭툭 다독여줬다. 배가 불러 손으로 두들길 때마다 통통거리는 귀여운 소리가 났다. 야쿠는 설핏 웃음이 나왔다. 사자는 입을 벌려 크게 하품했다. 하품은 전염성이 있는지 곧이어 야쿠도 사자를 따라 하품을 했다. 오늘 많이 피곤하긴 했다. 사자 우리 두 군데를 대청소하는 건 베테랑 야쿠에게도 힘이 드는 일이었다.

새끼를 키우는 곳이라 그런지 온도가 너무 덥지도 춥지도 않았다. 야쿠는 서서히 몸이 풀어지는 것을 느끼곤 모로 누워 한쪽 팔에 얼굴을 기댔다. 슬쩍슬쩍 눈이 감겼다 떠졌다. 점점 까무룩 해지는 정신 속에서도 새끼 사자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건 느껴졌다. 잠시 뒤 야쿠는 잠이 들었다.

 



으음…….”

눈꺼풀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끈적이는 접착제로 눈가를 풀칠한 마냥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도대체 지금 몇 시인거야. 출근하는 시간인가? 야쿠는 더듬더듬 손을 움직여 머리맡에 있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억지로 눈을 뜨고 핸드폰 버튼을 눌렀다. 어둠 사이로 시리도록 밝은 빛이 새어 들어왔다.

12:06

생각보다 얼마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리에프 저녁을 준 게 7시쯤이었으니 대략 5시간 정도 잠을 잔셈이었다. 야쿠는 바닥에 누운채로 몸을 쭉 늘려 기지개를 켰다. 마디마디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상체를 일으키고 야쿠는 어둑한 주변을 둘러봤다.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자가 보이지 않았다. 바닥에 있어야할 조그만 생물이 보이지 않자 야쿠는 마음이 급해졌다. 더듬더듬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벽을 짚고 있을 찰나 시꺼먼 인영이 야쿠 앞에 불쑥 나타났다. 순간 몸에 한껏 긴장이 들어갔다.

이 시간에 자신 말고는 사육장에 사람이 있을리 없었다. 모두들 퇴근한지 오래고 오늘 당직조차 자신이기에 다른 파트는 몰라도 고양잇과 사육장에는 야쿠 혼자만 있어야 했다. 도둑인가. 야쿠는 떨리는 몸에 애써 힘을 줬다. 손가락에 온 정신을 집중해 야쿠는 재빠르게 스위치를 눌렀다. 형광등이 몇 번 깜빡이더니 이내 환한 빛이 방 안을 밝혔다.

제 앞에 있는 인영의 정체를 보고 야쿠는 숨이 턱 막혔다. 자기보다 키가 한뼘 정도 큰 사람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남자는 짧은 은색 머리를 가지고 있었다. 하얀 살결은 그가 동양인이 아님을 말해줬다.

누구세요?”

떨리는 목소리를 제대로 감추지 못하고 야쿠는 급한 마음이 앞서 정체불명의 남자에게 물었다. 남자는 야쿠의 목소리가 들리자 갑자기 환하게 웃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답을 하진 않았다.

여긴 대체 어떻게…….”

재차 야쿠가 남자에게 물었다. 야쿠의 계속되는 질문에 남자는 인상을 한껏 찡그리더니 무언가 말하려고 입을 오물거리기 시작했다. 가시가 목에 걸린 사람처럼 남자는 한참동안 목과 얼굴을 이리저리 움직이다가 겨우 목소리를 냈다.

, , 야쿠상

남자의 음성에 야쿠는 벙찐 표정을 했다. 자신의 질문에 나온 대답이 겨우 야쿠상이라니. 그리고 대체 이 남자는 누구기에 내 이름을 알고 있지? 질문이 마인드맵처럼 뭉게뭉게 연상되었다. 수상하기 그지없는 남자는 자신의 이름만 되풀이하고 있었다. 신고라도 해야 하나. 야쿠는 핸드폰을 들어 경찰서 번호를 입력하다 마지막으로 남자의 얼굴을 다시 봤다.

?”

익숙한 무언가가 야쿠의 눈길을 잡아챘다. 저건……. 야쿠는 낯선 사람에게 한발자국 다가가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남자의 초록색 눈에는 자신의 얼굴이 한가득 담겨 있었다. 은발, 녹색 눈. 설마. 야쿠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자에게 소리쳤다.

설마, 설마, 리에프……?”

야쿠의 입에서 리에프라는 단어가 튀어나오자마자 남자는 야쿠를 덥석 안았다. 이게 뭔 일인가 싶으면서도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은 야쿠는 남자가 안던지 말 던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야쿠상!!!”

진짜 리에프야?”

여러 상황을 조합한 결과 이 남자는 새끼 사자 리에프로 보였다. 믿을 순 없었지만 눈에 보이는 이 생명체를 그것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

, 어째서 사람이 된 거야?”

정말로 궁금했다. 잠들기 전까지만 해도 사자였던 리에프가 돌연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난 건 커다란 궁금증을 유발시키기에 적합했다.

야쿠상!!!”

?”

생일축하해요!!!”

뜬금없는 리에프의 말에 야쿠는 다시금 멍청한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야구방망이로 뒤통수를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쿠로상이 오늘 놀아주면서 말해주셨어요. 오늘이 야쿠상 생일이라구!”

방방 뛰면서 말하는 리에프는 사자 리에프의 모습과 닮아보였다.

저도 야쿠상 생일 축하하고 싶었어요! 쿠로상이 생일은 축하해야한다고 말했어요!”

쿠로오가 쓸데없는 이야기를 새끼 사자에게 했나보다. 야쿠는 한숨이 절로 나왔다. 사자한테 생일을 설명한 쿠로오도 어이없었고 그렇다고 해서 축하한다고 사람으로 변신한 리에프도 어처구니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까지 될…….”

야쿠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왜냐하면 입술에 무언가 닿았기 때문이었다. 현실적이지 않은 감각에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다시금 입술에 따뜻한 무언가가 닿았다. 아까보다 길게 닿은 무언가가 리에프의 입술이라는 걸 깨달았다.

, 뭐하는 거야!!!”

? 이거 매일 야쿠상이 해주시는 거잖아요.”

당당하게 대답하는 리에프에게 야쿠는 반박할 수 없었다. 물론 자신이 매일 리에프에게 입을 맞춰주었지만 그건 엄연히 사자일 때 이야기였다.

지금은 사, 사람이잖아…….”

그게 어때서여, 전 야쿠상이 좋단 말이 에여!”

그렇게 말하면서 리에프는 막무가내로 다시 야쿠에게 입을 맞췄다. 비현실적인 일들이 한꺼번에 일어나 야쿠에게 더는 반박할 힘이 없었다. 그래도 제 생일을 축하해준다며 사람으로 변신까지 한솔직히 말하자면 야쿠는 믿겨지진 않았다. 아직도 꿈처럼 느껴졌다리에프가 기특해 손을 들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리에프는 야쿠의 손길에 기분 좋은 소리를 내었다. 야쿠의 손이 머리칼을 지나 따뜻한 뺨에 닿았을 때, 리에프는 제 손으로 야쿠의 손을 감쌌다. 그리고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야쿠상, 생일 축하해요. 많이많이 좋아해요.”

 

 





2016.08.08.

Happy Birthday Yaku!

pinn_p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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