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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에야쿠] -23

-23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오늘도 여기서 자는 거야?”마지막 비품을 창고에 집어넣으면서 쿠로오가 물었다. 심각한 표정으로 살코기를 자르던 야쿠는 쿠로오의 질문에 돌아보지도 않고 입으로만 대답했다.“어.”숭덩숭덩 썰린 고기는 lev라고 써진 원형 스테인리스 그릇에 한 조각씩 담겼다. 꽤나 수북이 쌓인 고기 위로는 아이보리색의 가루가 눈처럼 뿌려져있었다. 야쿠는 핏물이 흥건한 도마와 칼을 설거지하고 다른 스테인리스 그릇에 물을 담아 나무 판에 끼웠다. 오른쪽에는 빨간 고기가 담겨 있었고 반대쪽에는 찰랑찰랑 물이 담겨있었다.“근데 진짜 힘이 넘치더라.”“그러게 말이야. 그런 사자는 처음 봤다니깐?”“오늘 너 대신 놀아주는데 내가다 진이 빠졌어. 켄마랑은 비교도 안 된다.”“켄마는 너무 조용하고 걔는 ..

2016.08.08

[하나마츠] -22

-22하나마키 타카히로/마츠카와 잇세이 그 날은 어떻게 보면 마츠카와에게는 공포와도 같았다. 최대한 그의 선에서 내색하지 않으려 애썼지만 은연중에 나오는 의식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나마 반에서는 평소와 같이 행동하는 게 어색하지 않다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었다. 전과같이 친구들과 웃고 떠들며 수업시간에 졸기도 하는 일상을 유지하며 마츠카와는 틈틈이 엄습해오는 불안과 대치했다. 가만히 있다 보면 누군가의 시선이 틀어박히는 느낌도 들었고 제 목 뒤를 손톱으로 살짝 긁는 느낌에 소름이 쫙 끼친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처음엔 목 뒤 그리고 강가에 한 방울 떨어트린 물감처럼 이질적인 느낌의 그 것은 몸 전신으로 퍼져나갔다. 피부가 일어나고 긴장감에 침 삼킬 생각조차 못할 정도로 마츠카와는 정신적으로 힘에 ..

2016.06.09

[미사와] -21

-21미유키 카즈야/사와무라 에이준 “이쪽은 주니치의 사와무라 에이준. 아, 알고 있을 텐데 괜히 말했군.”감독 옆에 정자세를 하고 서 있는 사람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아마 재팬시리즈에서 마지막 리드를 할 때보다 더 혼란스러웠다. 그러나 미유키 카즈야는 프로였다. 공과 사는 완벽히 구분할 줄 알았으며 그 신념이 기반이 되어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점점 빨리 뛰는 심박 수를 진정시키기 위해 속으로 숨을 여러 번 삼키며 감독이 하는 말을 경청하려 노력했다.“둘은 고등학교 때 배터리를 짜봤으니깐 다른 사람보단 편할 거야.”감독이 뭐라 말하든 사와무라는 묵묵히 그 자리를 지켰다. 배터리. 국가대표를 달고 누군가와 배터리를 짜야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일 줄은 몰랐다. 물론 국가대표..

2016.05.27

[엔노후타] 39

39엔노시타 치카라/후타쿠치 켄지 엔노시타 치카라는 자신의 몸에 다른 이의 이름이 새겨져있었다. 몇 만분의 일 확률로 나타난다는 다른 이의 이름은 운명적인 상대라는 낭만적인 이야기를 동반했다. 중학교 때, 목 뒤가 유난히 간지러운 날이 있었다. 상처 위에 딱지가 앉아 아물기 시작하면 간지럽듯이 그날은 목덜미를 긁지 않으면 못 배기는 지경까지 왔었다. 결국 빨갛게 부어 화끈거리는 목 뒤를 집에 와서 거울로 비춰봤을 때, 그는 들고 있던 손거울을 떨어트릴 정도로 깜짝 놀랐다. 희미했지만 붉은 살 위에는 칼로 새긴 것 같은 모양의 한자가 써져 있었다. 二口. 뒷 글자는 정확하게 보이지 않았으나 앞에 두 글자는 간단한 한자여서 뚜렷이 보였다.‘후…타쿠…치? 아니 가타카나인가. 니…로?’손가락으로 툭 튀어나온 상..

2016.04.06

[리에야쿠] -20

-20하이바 리에프/야쿠 모리스케 벚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봄의 어느 날, 리에프와 야쿠는 헤어졌다. 누가 먼저 말한 것도 아니었는데, 당연한 수순인 마냥 둘은 그 이후에는 남남인 것처럼 행동했다. 나풀나풀 떨어져 거리 위에 켜켜이 쌓여있는 벚꽃 잎을 볼 때마다 리에프는 마음 한 구석에 허전함을 느꼈다. 당연할 거라 생각했던 감정은 의외로 감당하기 버거웠다. 적응하려면 꽤나 오랜 시간이 걸릴 꺼라 리에프는 생각했다. 삼사년 정도 야쿠와 연애를 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서로 볼 거 다보고 할 거 다 한 사이라 부끄러움도 새로움도 없을 관계였다. 사랑의 설렘이라는 유통기한이 끝난 연인들의 말로는 자연스럽게 헤어짐으로 연결됐다. 그래서 그 날 자연스럽게 헤어졌다. 길지 않은 시간동안 사귀..

2016.04.06

[카오신] -19

-19나기사 카오루/이카리 신지 최근 들어 신지는 몸이 많이 아팠다. 두통도 자주 왔고 배도 살살 아팠고 무엇보다도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일단 잠을 드는데 까지는 문제가 없었다. 그리곤 한 시간 남짓 잠 들었을까, 신지는 갑자기 또렷해지는 정신에 잠이 깨고는 다시 잠을 청할 수가 없었다. 일주일 정도 반쯤 헤롱헤롱한 상태가 되어 캠퍼스를 다니자 같은 과의 아스카가 그거 장협착증 아니냐며 걱정 반 핀잔 반섞인 잔소리를 해댔다. 처음엔 장협착증이 무슨 병인지 몰랐으나 인터넷에 검색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서둘러 대학병원에 진료 예약을 잡았다. 신지는 걱정되는 마음에 그 날 밤을 꼬박 뜬 눈으로 지새웠다.“이카리 신지 님, 3번 진료실로 들어가세요.”스피커에서 들리는 안내 목소리를 듣고 신지는 무거운 몸..

2016.03.08

[후루사와] -18

-18후루야 사토루/사와무라 에이준 너는 대체 어째서 나를 봐주지 않는 것일까. 그래, 너는 처음 본 그날부터 나를 바라봐주지 않았어. 크고 예쁜 너의 눈은 오로지 그 사람만을 담았다. 나 역시도 그 사람을 원하기는 했지만 그 의미가 너와 다르다고 확신 할 수 있었다. 내 삐딱한 시선은 너의 시선을 가지지 못한 탓을 너에게로 돌렸다. 감히 너란 사람을 마음에 품은 건 내 멋대로 이었지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버틸 수 없었다. 사랑이란 추상적인 감정은 처음이었다. 생경한 감정이었음에도 난 널 본 순간 사랑이라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너는 날 사랑하지 않는 다는 걸 알고 우울했다. 네 모든 시선 끝에는 다른 사람들이 걸려있었고 네 모든 말 속에는 내가 아닌 다른 이가 있었다. 특히나 너는 그를 그리고 그들..

2016.02.20

[빙흑] -17

-17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쾅. 여러 안주와 술병들이 즐비해 있는 탁자가 크게 요동쳤다. 원인은 바로 금발의 남자였는데 무엇인가 아주 분하다는 얼굴로 몸을 떨면서 서있었다. 그가 탁자를 내리치며 일어났기 때문에 큰 소리가 났던 거였다. 술집에 있던 모든 이의 시선이 금발 남자에게로 향했다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자 다시 제각각 원래 향했던 곳으로 눈길을 거뒀다. 그런 상황에 전혀 개의치 않는 다는 듯 금발 남자는 제 앞에 있는 까무잡잡한 남자를 보고 쏘아댔다.“아오미넷치는 늘 그게 문제임다!”“아? 키세 또 시작이냐.”앞에서 떠들어대는 금발 남자가 귀찮다는 듯 아오미넷치라 불린 남자는 무심한 표정으로 귓구멍을 후볐다. 그 태도에 열이 받은 키세는 다시금 입을 벌려 말했다.“메시지에 답해주는 게 ..

2016.02.05

[빙흑] 夏

夏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장마 전선이 물러난 땅 위는 더위가 보란 듯이 기승을 부리고 있었다. 지글지글 익어가는 아스팔트를 바라보자면 누구든 밖에 나오기를 꺼려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7월에서 8월로 넘어가는 어느 무렵, 으레 그렇듯이 매주 여름축제가 열리고 있었다. 공원을 주변으로 형성된 길과 골목들에는 밤이 되면 상점들이 즐비했고 노점상 또한 여름축제의 분위기를 거들었다. 가로수와 가로수 사이를 엮듯이 수놓은 전등들은 밤거리를 비추기에 적합했다. 은은한 전등은 여름축제의 멋을 살리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해가 강렬하게 내리 쬐는 낮에도 사람들은 밤에 하는 축제에 대해 떠들기 바빴다. 그만큼 여름축제라는 것이 일본인들에게는 생활 속에 자리 잡은 자연스러운 일상과도 같았다.아이들은 놀이터에서 늦게..

2016.02.03

[빙흑] 春

春히무로 타츠야/쿠로코 테츠야 봄은 낭만적임을 대변하는 계절이었다. 3월 초입의 꽃샘추위가 물러가고 한창 벚꽃이 만개할 무렵의 계절은 모든 사람에게 설렘과 아름다움으로 다가왔다. 수선화와 목련은 봄의 마지막 추위를 정통으로 맞으며 아름다움을 뽐내면서 피었다가 지고 아직 봉우리로 맺힌 튤립과 철쭉은 늦은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유채와 벚. 이 둘은 봄의 중간에서 징검다리 역할을 톡톡히 해내는 꽃들이었다. 그중에 히무로는 유독 벚나무를 좋아했다. 물론 일본인이라면 응당 벚을 좋아했지만 히무로는 유독 벚나무를 좋아했다. 3월에서 4월로 넘어가며 연분홍빛 꽃을 피워내는 것도 좋아했으며 꽃잎이 다 떨어지고 잎만 남은 싱그러운 벚나무도 좋아했다. 그래도 모름지기 사람인지라 꽃잎이 만개한 벚나무를 더 좋아했다.매년 ..

2016.01.31